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29일 사퇴했다. 윤 대통령의 4월 말 미국 국빈(國賓) 방문을 한 달 남짓 앞두고 김일범 의전비서관, 이문희 외교비서관에 이어 김 실장까지 교체되면서 방미 조율 과정에서 중대한 실책을 범해 경질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후임 안보실장에는 조태용 주미대사가 내정됐다. 차기 주미대사에는 조현동 현 외교부 1차관을 내정하고 금명간 미 행정부에 아그레망(주재국 임명 동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3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 실장은 29일 “저로 인한 논란이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며 자진 사퇴했다. /뉴시스

김 실장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오늘부로 안보실장직에서 물러나고자 한다”고 밝혔다. 고려대 교수 출신인 김 실장은 “1년 전 대통령님으로부터 보직을 제안받았을 때 한미 동맹을 복원하고 한일 관계를 개선하며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면서 “미국 국빈 방문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어 새로운 후임자가 오더라도 차질 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 국빈 방문을 앞두고 외교·안보 사령탑이 이례적으로 중도 교체되면서 그 배경을 두고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실장은 윤 대통령의 방미 준비 과정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지난 1월 블랙핑크·레이디가가 등이 출연하는 특별 문화 프로그램을 제안했음에도 확답을 미루고 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3월 초 미국을 방문한 외교 당국자를 통해 뒤늦게 이런 사실을 파악했고, 김 실장 등 외교안보 참모들의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김 실장도 이날 “저로 인한 논란이 더 이상 외교와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는 “국빈 초청국 정상 부부가 제안했음에도 답변을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것은 양국 신뢰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일”이라며 “윤 대통령이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해 외교안보 라인 쇄신 차원에서 김 실장 교체를 결단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성한 안보실장 교체설은 지난 27일 이문희 외교비서관 교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김 실장 지휘를 받는 이 비서관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 실무 준비를 총괄해 왔다. 그런 이 비서관이 방미를 한 달 앞둔 시점에 전격적으로 교체되자 대통령실 외교·안보 라인이 행사 준비 과정에서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고 김 실장도 교체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김일범 의전비서관도 대통령 방일 엿새를 앞둔 이달 초 물러나면서 이런 관측에 무게를 더했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28일까지만 해도 ‘김성한 실장 교체 검토’설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다 하루 만에 자진 사퇴 형식으로 다시 정리된 것이다.

김 실장 경질을 불러온 방미 행사는 한국 걸 그룹 블랙핑크와 미국 가수 레이디가가의 합동 공연으로 알려졌다. 미 행정부에선 지난 1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의 뜻을 반영해 이런 제안을 담은 서신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 실장이 지휘하는 국가안보실에선 3월 초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미 행정부 측 요청을 받아 7차례나 답변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지만 안보실에선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실이 윤 대통령에게 3월 초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했다. 윤 대통령은 김 실장으로부터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하다가 3월 초 미국을 방문한 외교 당국자가 이런 사실을 파악해 보고하면서 알게 됐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뒤늦게 행사가 무산될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 대통령은 경위 파악을 지시했고, 그 결과 김 실장과 이문희·김일범 비서관이 책임이 있다고 보고 경질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김 실장은 윤 대통령의 대광초등학교 동창인 데다, 윤 대통령이 2021년 3월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 외교·안보 가정교사로 합류했고 대선 캠페인 때는 윤 대통령의 외교·안보 공약 수립을 주도했다. 이런 각별한 인연의 김 실장을 교체한 것은 그만큼 실책이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중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미 측의 행사 제안을 보고받았지만 “미 백악관 고위 관계자와 최종 조율 과정에서 이 공연 제안을 듣지 못해 판단에 미스가 있었다”는 취지로 소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12년 만에 성사된 한국 정상의 국빈 방미를 조율하면서 초청국 정상의 제안을 무성의하게 처리하고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것은 양국 신뢰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3월 들어 징용 문제 해법을 내놓고 일본을 방문해 한일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김 실장 등 외교안보 참모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교체를 결심했다는 말도 나온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 정상화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고 결단을 내렸음에도 외교안보 참모진이 대통령의 뜻을 국민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소통 노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대통령실 일각에선 김 실장을 주축으로 한 안보실의 ‘정보’ 칸막이가 심해 대통령 비서실이 외교·안보 관련 정보에서 소외된다는 불만이 제기된 점도 김 실장 교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도 나온다. 대통령 비서실의 한 인사는 “대통령 해외 방문 전 고위급 점검회의 때 안보실이 보안을 이유로 일정이나 의제를 비서실과 잘 공유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내부적으로 나오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김 실장이 직속 부하인 김태효 안보실 1차장과 정책 추진 과정이나 언론 브리핑과 관련해 갈등을 겪었다는 말도 대통령실 내부에서 나온다. 김 차장은 문제가 된 방미 문화 행사와 관련한 정보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김 실장이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로서 안보실 내부 소통을 원만히 이끌어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했다. 대통령실 일각에선 김 실장이 특정 학맥 인사를 중용한 게 논란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방미를 앞두고 안보실장 교체에 부담도 느꼈다”며 “다만 논란이 불거진 이상 친구라도 교체할 수밖에 없다는 원로·참모들의 조언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러나 야당에선 한미 정상회담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김 실장 교체를 납득하기 어렵다며 “외교안보 라인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책임 있게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가안보실장, 외교비서관, 의전비서관이 모두 경질됐다”며 “과연 한미 정상회담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누가 경질을 주도하고 있는지 명백히 밝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