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미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나온 미 정보기관 수장들.왼쪽부터, FBI국장 크리스토퍼 레이, NSA국장 폴 나카소네, NIA국장 에이브릴 헤인즈, CIA국장 윌리엄 번스, DIA국장 스콧 베리에 ./EPA 연합뉴스

외교·안보 원로들은 10일 미국이 한국 등 우방을 도청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유출된 데 대해 “우방끼리 첩보전을 펴는 건 공공연한 비밀로 흥분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문서 유출 경위에 관해 미국 얘기를 충분히 듣고 우리의 방첩 역량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원로들은 “야당이 초당적 사안인 국가 안보 문제를 정부 비방 소재로 삼는 행태는 삼가야 한다”면서 “고도화한 북한 핵·미사일 대책을 비롯해 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우리 기업 생사여탈권과 직결된 현안을 다룰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여야가 성숙한 자세로 이번 사태 해결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본지는 이날 전직 외교·안보 부처 고위 관계자들에게 이번 도청 사태 해법과 관련한 조언을 들었다.

이용준 전 외교부 북핵 대사는 “동맹이 이 정도면 한국 군사 활동, 주한 미군 등에 관심 있는 다른 나라는 한국 정부·군을 상대로 얼마나 많은 도·감청 첩보전을 펴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일을 우리 국가 기밀 보안 시스템에 허점이 없나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도청 논란이 불거진 건 분명 껄끄러운 일이지만 흥분할 일은 아니다”라면서 “오바마 미 정부가 독일 메르켈 총리 휴대폰을 도청해 논란이 벌어진 적도 있는 등 역대 어느 나라에서나 도·감청 문제는 심심찮게 벌어져왔다”고 했다. 천 전 수석은 본인도 2010년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를 만나 우다웨이 당시 중국 한반도 사무 특별대표에 대해 말한 내용이 폭로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통해 알려져 논란이 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천 전 수석은 “논란을 계기로 우다웨이를 따로 만나 서로 반갑게 끌어안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더 친해졌다”면서 “사실 프로끼리는 이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외교 안보 원로들이 보는 미 도청 파문

국정원 1차장을 지낸 김숙 전 유엔 대사는 “정보기관의 정보 수집에는 피아(彼我)가 따로 없다는 것은 다들 아는 이야기 아니냐”면서 “하지만 그게 노출된 것은 또 다른 문제이므로 미 측에 어떻게 된 사정인지 충분히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김 전 대사는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미국을 상대로 비난 성명을 내는 건 동맹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특히 대통령의 방미(訪美)를 앞둔 만큼,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는 “일단 이 문제가 정보 영역에서 외교 영역으로 넘어왔고,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정부가 쉬쉬할 게 아니라 냉정하면서도 단호한 입장을 미국에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도 “이런 조치도 안 하면 나라 꼴이 이상해진다”며 “이건 한미 동맹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더 건전하게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했다.

남주홍 전 국정원 1차장은 “1970년대 카터 미 정부 당시 주한 미 대사관은 박정희 정부가 자주 국방 강화책으로 핵개발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동태 파악을 위해 청와대 도청을 시도했다가 발각됐고, 이에 양국 관계가 얼어붙기도 했다”면서 “감정적 대응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일을 통해 우리가 미국에서 더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뭐가 있는지 실리를 챙기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들은 국가 안보와 관련한 논란을 해결하는 데는 야당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전직 외교부 차관은 “야당 입장에서 이번 사안과 관련해 ‘보안에 허점을 보였다’며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이 아니라 ‘대통령실 졸속 이전 때문이다’ 하는 식으로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해선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번 도청이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급히 옮기면서 도청 방지 조치를 제대로 못 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남 전 차장은 “대통령실이 들어간 현 건물은 원래 국방부 청사로, 어느 곳보다 보안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라면서 “갑자기 이번 사안에 용산 이전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전직 외교부 장관은 “국가 안보, 다른 나라와 벌이는 외교 문제는 초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대표적 사안”이라면서 “야당이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정쟁화하거나 대통령 비방 소재로 삼으면 외교 정책이 꼬이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국민 피해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번 외교 문제는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핵심 우방인 미국과 벌어진 만큼, 여권도 야당에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한 협조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기밀 문서 유출이 러시아 등의 공작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 만큼, 좀 더 신중히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직 방첩 기관 고위 관계자는 “사실 이번에 유출된 내용을 보면 이미 언론에 수차례 보도된 것으로 특별히 새로운 것도 예민한 내용도 없다”면서 “유출 문서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점에 비춰봤을 때 러시아가 일부 확보한 미 문서를 가공해 퍼트리면서 미국과 우방국의 전열에 균열을 일으키려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위 전 대사는 “이번 도청 파문을 어느 레벨에서 어떻게 해결할지는 정부 선택에 달렸다”면서 “대통령이 직접 나설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실무선에서 절차를 밟아 일단락시키는 것이 곧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