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에서 존 커비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그는 미 정보기관의 ‘도청 문건’ 유출 의혹과 관련, “온라인에 게시된 일부 사례에서 조작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대통령실은 11일 “(미국 정보기관의)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한미 국방부 장관이 이번 사안과 관련해 전화 통화를 한 결과 ‘공개된 도청 문건 상당수는 위조됐다’는 사실에 양 장관의 견해가 일치했다”면서 이같이 전했다. 미 정보기관이 한국 등 우방을 도청한 것이라는 문서가 지난 6일(현지 시각)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닷새 만에 양국 국방장관이 직접 통화하며 수습에 나선 것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날 통화는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의 긴급 요청에 따라 이뤄졌다. 오스틴 장관은 이날 한국 아침 시간에 맞춰 이종섭 국방장관에 전화를 걸어 이번 사안과 관련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앞으로도 이 건과 관련해 한국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고 전적으로 협력해나가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특히 양측은 논란이 된 문건 내용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 공감했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최근 이번 문건에 등장하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문건 내용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답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 측도 초기 분석에서 이번 문서가 조작된 정황을 파악해 정밀 분석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방첩 기관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문서를 보면 러시아 사상자 수가 실제보다 부풀려져 있고,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 양식을 흉내 낸 티가 난다”면서 “미국의 적대 세력이 사실과 거짓 정보를 교묘하게 섞어 미 기밀 문서인 것처럼 조작해 외신을 통해 흘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미 국방 장관이 이날 문건이 ‘위조’됐다고 의견 일치를 본 것도 이 같은 분석에 따라 나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과 함께 미 측에 도청된 나라로 언급된 이스라엘·프랑스·캐나다 등도 문건 내용을 거듭 부인하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9일(현지 시각) 성명에서 “미 언론이 보도한 도청 문건 내용은 전혀 근거가 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최고 기밀’로 분류된 미 문서에는 이스라엘 대외 첩보 기관인 모사드의 고위 지도자들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 장악에 맞서는 반정부 시위를 부추겼다는 의혹이 담겼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모사드의 관리들은 반정부 시위를 포함한 어떤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도록 직원들을 독려한 적이 없다”며 “모사드는 창립 이래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가치를 위해 헌신해왔다”고 했다.

프랑스도 문건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프랑스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프랑스·영국·미국 등 100명 미만의 특수 작전 요원이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한다는 문건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프랑스 국방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프랑스군은 없다”면서 “유출됐다는 문서는 프랑스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복수의 군사 전문가를 인용해 “도청 문건은 허위 정보 작전의 일부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캐나다는 논란이 된 문건에서 러시아 정보기관이 지원하는 해커들의 올해 초 사이버 공격으로 캐나다 천연가스 파이프 라인 회사가 막대한 경영 피해를 입은 것으로 묘사됐다. 이와 관련, 캐나다의 오드리 샹푸 캐나다 공공안전부 대변인은 10일 우리는 유출된 것으로 알려진 정보에 관해 확인 또는 부인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캐나다는 파이브 아이즈(미국·영국·뉴질랜드·캐나다·호주로 이뤄진 영어권 정보 공유 동맹체)의 일원으로서 그들과 계속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조태용 신임 국가안보실장(오른쪽 두 번째)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국가안보실 김태효 제1차장(오른쪽), 임종득 제2차장(왼쪽)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방첩 전문가들은 이번 ‘미 도청 문건’ 내용 대부분이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사국과 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미 우방국들인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이번 사태로 누가 이득을 보는지 살펴보면 누가 이번 일을 일으켰는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직 기무사 고위 관계자는 “기밀이라는 문건의 특성상 진위 여부는 끝까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진위 결과를 떠나 이번 논란으로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는 미 우방국 등 자유민주주의 연대에 혼란을 준 것만으로도 이번 사태를 기획한 세력으로서는 큰 성과를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왜 이번 도청에 중국이나 북한 등 현재 러시아와 연대하는 나라는 등장하지 않느냐”면서 “러시아가 이번 사태의 배후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문건 일부는 위조됐더라도 사실일 수도 있는 만큼, 이번 사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조만간 제2의 미 기밀 문서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 정부는 10일(현지 시각) 논란이 되는 문서는 조작된 것이라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브리핑에서 “온라인에 게시된 일부 사례에서 조작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언론이 이와 관련해 보도하는데 신중을 기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베단트 파텔 미 국무부 수석부대변인은 “우리는 한국과 여러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며 오는 26일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과 블링컨 국무장관, 퍼스트레이디(질 바이든 여사)는 한국 카운터파트와 파트너들을 국빈 방문에서 맞이할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