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수 전 대통령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 /외교부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장관급)을 지낸 박종수(63)씨가 20일 “러시아는 반(反)체제 인사 등에 대한 린치, 독극물 살해가 비일비재하다”며 “이제 전세계에 나가 있는 한국인들이 주요 타깃(target)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 로이터 인터뷰에서 ‘대량 살상’ 같은 상황을 가정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시사하고 러시아 정부가 이를 문제 삼은 가운데, 정부 외교를 비판하다 이같은 주장을 펼친 것이다. 야당이 한국의 무기 지원을 기정사실화하며 이 문제에 대한 정쟁화에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박 전 위원장은 이날 오전 친야(親野) 성향 방송인 김어준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로 올해 2월부터 수감돼 있는 알렉세이 나발니 변호사 등을 언급하며 “러시아는 자국민에 대해서도 필요하면 한시라도 암살을 하고 그런 경우가 있다”며 “냉전 때는 아예 분리가 돼 있었기 때문에 관계가 없었는데 이제 우리 한국인이 주요 타깃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 인터뷰로 인해 한국인의 신변이 위협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김어준씨는 이에 대해 “무섭게 왜 독극물 얘기를 하냐”며 “여기(러시아)서는 그냥 협박하고 말지 않으니 걱정이다”고 했다.

박 전 위원장은 러시아 샹트페트르부르크국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모스크바에 소재한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에서 공사참사관을 지낸 러시아 전문가다. 21대 총선 때 전남 여수을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예비후보로도 이름을 올린 전력이 있고, 민주당 외교·안보분야 자문위원도 지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2021년 9월에는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북방경제협력위원장(장관급)에 임명됐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로이터 인터뷰 이후 이날까지 외교부 채널로 러시아 측 항의가 접수된 것은 없고, 현지의 우리 대사관도 정상적으로 외교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스1

외교가에선 야권이 윤 대통령의 발언을 근거로 무기 지원을 기정사실화해 ‘공포 마케팅’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해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인 대륙간탄도일미사일(ICBM) 8회 발사 포함 70차례에 가까운 역대급 도발을 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중국과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때마다 제재가 이뤄지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국과 러시아 간 북핵수석대표 협의도 지난해 5월과 7월 두 차례에 그쳤는데, 이런 측면은 비판하거나 다루지 않은 채 “러시아 협조가 없으면 북한 문제 해결이 요원해진다” “한반도 평화는 물건너간다”는 식으로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20일에는 ‘독극물 살인’까지 언급됐다.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은 이날 KBS 라디오에서 “북핵 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 체제 수립, 북한 내 급변 사태 수습, 평화 통일 전부 러시아가 우호적인 태도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며 “선을 넘지 않을까 상당히 우려된다”고 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 말 몇 마디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수천냥 빚을 진 날”이라고 했고, 이낙연 전 대표도 페이스북에서 “윤석열 정부는 한국의 지정학적 숙명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야당에선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주면 러시아는 당연히 한국을 적대 국가로 선포할 것”(김병주 의원) “러시아 같은 인접 국가와 적대 관계를 자처하는 무모하고 무지한 대통령도 처음”(김민석 의원) 등의 발언도 나왔다.

전직 외교부 고위 간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한 무력 분쟁이 아니라 러시아의 불법적 침공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며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러시아가 대통령의 원론적 발언에 필요 이상으로 강경 대응하고 있는데 야당이 맞장구를 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연대한다는 자유·민주 진영 국가 중 이런 정쟁을 벌이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윤 대통령 인터뷰 관련 “인도적 기준으로 봤을 때 국제 사회가 심각하게 여기는 살상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 어떻게 지켜볼 수만 있겠냐’ 하는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답변이었다”며 “현재 우크라이나 지원 내용에 변화가 없다. 러시아 당국이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대해 코멘트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러시아 행동에 달려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