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를 돕는 시민 단체가 피해자와 11년 전 맺은 약정을 근거로 판결금의 20%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해당 단체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을 반대해왔지만, 일부 피해자 유족이 최근 이를 수용해 2억원이 넘는 판결금을 수령하자 약정서를 근거로 돈을 내라는 내용증명까지 보냈다. 유족들은 최근에서야 ‘어떤 형태로든 돈을 받을 경우 20%를 단체에 지급한다’는 약정을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감사인 김모 변호사는 이달 1일 판결금을 수령한 한 피해자 유족들에게 ‘약정금 지급 요청 공문’을 보내 “수령한 2억5631만3458원 중 20%인 5126만2692원을 시민 모임에 보수로 지급하셔야 한다”며 “많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광주·전남지부 출신으로 단체의 전신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를 지냈다.
지원 단체가 지급을 요구하며 근거로 내세운 건 2012년 10월 미쓰비시중공업 징용 피해자 5명과 맺은 약정이다. 당시 약정서를 보면 “이 사건과 관련해 손해배상금·위자료·합의금 등 그 명칭을 불문하고 피고(일본 기업)로부터 실제 지급받은 돈 중 20%를 모임에 교부한다”고 돼 있다. 약정서 원본과 함께 1인당 지급해야 할 구체적인 금액이 원 단위까지 기재된 ‘상속인별 지급 보수액’ 서류를 첨부하며 “선생님들은 금원(金員) 수령 권한과 더불어 어르신이 약정한 내용을 이행할 의무도 상속하셨다” “약정에 따라 지급하셔야 한다”고 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등은 이를 근거로 유족들과 접촉해 재단이 10년 넘게 피해자를 지원한 점 등을 설명하며 약정금 지급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정을 체결한 피해자 5명 중 3명이 세상을 떴는데, 3명 중 2명의 유족들이 정부 해법에 찬성해 지난달 중순 2억원이 넘는 판결금을 수령했다. 외교 소식통은 “일부 유족은 피해자가 생전에 체결한 약정서의 존재를 수령 후에야 안내를 받아 지급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원 단체는 유족들이 판결금을 수령한 직후 유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금액 일부를 요구했는데,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약 2주 만에 내용증명을 보내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유족 일각에선 정부 해법을 비판하고 판결금 수령을 만류하던 지원 단체가 지급이 이뤄지자 금액 일부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원 단체는 우리 정부가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꾼 망국 해법”이라 비판해왔고, 일각에선 “법적으로 무효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국언 이사장은 지난 3월 정부 해법에 생존자 3명이 반대한다는 내용증명을 행정안전부 산하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전달하며 “일제 전범 기업을 지원하는 재단으로 거꾸로 일하고 있는데 간판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또 올해 초 외교부가 징용 해법으로 ‘제3자 변제’를 공식 발제한 국회 공개 토론회 이후에는 “정부가 인권침해 사건을 단순히 돈 지급 문제로 전락시켰다”며 “보상은 부차적인 문제고 사죄가 먼저”라고 했다. 그런데 판결금 지급이 이뤄지자 유족들과 접촉해 ‘계산’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원 단체는 23일 피고로부터 지급받은 돈의 20%를 기부할 것을 명문화한 약정에 대해 “사회적 참사 등 공익 소송에서 일반적으로 있어왔던 일”이라며 “원고들이 인권 단체, 활동가 도움을 받아 수령한 금액 중 일부를 다른 공익 사업 기금에 출연하는 건 오히려 더 많은 선례로 남도록 권장되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개인적 이익을 취한 윤미향 의원의 경우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며 “강제징용 피해 어르신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보상금을 빼앗아 간다면, 이것이 조폭들의 보호비와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