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60) 전 몽골 대통령은 2013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대에서 연설을 했다. 주제는 자유와 인권이었다. 그는 “폭정은 영원할 수 없다” “자유가 인간 사회를 진보와 번영으로 이끈다” “몽골은 법치주의를 지지하며 개방 정책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의 연설 내용을 북한은 당시 알리지 않았다. 연설이 공개된 것은 몽골 대통령실을 통해서였다. 몽골 대통령실에 따르면 그가 당시 연설장을 떠날 때 청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박수를 쳤다고 한다.
방한 중인 엘베그도르지 전 대통령은 25일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북측에 정치범수용소와 핵 시설, 협동 농장 중 한 곳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 때문에 김정은과의 만남은 불발됐지만 2인자 김영남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몽골의 민주화 프로세스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내비쳤다”며 “90년대 의원으로 방북했을 당시 북한 주민들이 몸에 사치품을 두르고,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하던 상류층을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던 것을 기억한다. 북한에서도 몽골과 같은 민주화가 일어나 주민들이 인권을 누리길 바란다”고 했다.
엘베그도르지 전 대통령은 “지도자들이 북한을 상대할 땐 ‘안전지대(comfort zone)’에서 벗어나 주민들의 인권과 고통 같은 불편한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며 “도널드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과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북한 정권이 계속해서 주민들을 착취할 수 있도록 정당성만 부여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핵·미사일 같은 안보 문제와 북한 내 종교·표현의 자유 같은 인권 문제를 동등한 수준에서 제기해야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어질 수 있고, 그게 더 정치적으로 현명한 대북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엘베그도르지 전 대통령은 국제사형제반대위원회(ICDP)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가 140국이 넘는다”며 “한국도 가까운 미래에 폐지하기 바란다”고 했다. 한국은 사형 제도를 법률상 유지하고 있지만, 20년 이상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된다.
엘베그도르지 전 대통령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민주주의 국가 몽골에 한국은 가장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고 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회원인 국제 원로 그룹 ‘디 엘더스(The Elders)’ 회의차 방한한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강조한 것이 인상 깊었고 그동안 어느 한국의 대통령이 이 정도로 미션을 성공적으로 이행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가치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있다”고 했다.
엘베그도르지 전 대통령은 2009~2017년 2차례 재임했다. 80년대 후반 몽골 민주 연합을 창설해 몽골의 민주화에 기여했고, 1990년에는 몽골 최초의 민간 신문사를 창간해 언론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로 수교 33년을 맞은 한·몽골 관계와 관련, “많은 몽골 사람이 한국에서 일하며 쌓은 경험과 기술을 토대로 고향에 돌아와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있다”며 “한국은 우리에게 구원자와도 같은 나라”라고 했다. 외교부도 지난해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역내 국가인 몽골과 협력을 확대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