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가 24일 6·25전쟁 영웅인 고(故)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홈페이지의 안장자 정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문구를 삭제했다. 그간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에서는 백 장군의 안장 기록을 검색하면 비고란에 ‘무공훈장(태극) 수여자’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가 표시됐었다.
보훈부는 이날 백 장군 안장 정보에서 ‘친일파’ 문구를 삭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보훈부는 고인의 안장 정보에 ‘친일파’ 문구를 공시하는 것은 장례 문화에 맞지 않고, 사자(死者) 명예훼손 소지도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 보훈부 관계자는 “안장자검색 및 온라인참배란은 사이버참배 서비스 등을 제공해 안장자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오히려 명예를 훼손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특히 친일파 문구 게재는 문재인 정부 당시 아무런 법적 근거나 사회적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고 국가보훈처(보훈부 전신)와 국방부 등 관계 부처 내에서 임의로 결정하는 등 절차적 문제점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보훈부는 “게재 경위 등을 검토한 결과 백 장군은 ‘장성급 장교’로서 국립묘지법에 따라 적법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음에도,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안장 자격이 된 공적과 관계없는 문구를 기재하는 것은 국립묘지 설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안장자는 범죄경력 등 안장자격과 관련 없는 정보는 기재하지 않는다는 점, 유족의 명예훼손 여지가 있음에도 유족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은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당 내용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으로 조직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전체 위원 11명 가운데 8~9명이 친여 인사로 구성돼 편향성 논란이 제기됐던 점도 이번 결정에 참고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문재인 정부 보훈처는 백 장군이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다음 날인 2020년 7월 16일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를 현충원 홈페이지 안장기록에 명시했다.
백 장군 유족은 지난 2월 해당 문구 적시가 국립묘지법에 위배되고 사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보훈부에 삭제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조직된 친일파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 근무를 이유로 ‘친일파’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백 장군은 생전 인터뷰에서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다.
백 장군은 1993년 일본어판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근무 시절 조선인 항일 독립군과의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기술한 데 대해선 “1930년대 간도특설대 초기의 피할 수 없었던 동족 간의 전투와 희생 사례에 대해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일 뿐”이라고 밝혔었다. 보훈부는 백 장군 외에 노무현 정부 위원회가 ‘친일파’로 규정한 나머지 11명의 국가유공자 가운데서도 유가족의 요청이 있을 경우 관련 검토를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유공자들은 김백일 미군정 국방경비대(국군 전신) 3연대장, 김석범 2대 해병대사령관, 김홍준 국방경비대 4연대 창설 중대장, 백낙준 초대 연세대 총장, 백홍석 초대 육군 특별부대사령관, 송석하 전 국방연구원장, 신응균 초대 국방과학연구소장, 신태영 4대 국방부 장관, 신현준 초대 해병대사령관,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8대 국방부 장관 등이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백선엽 장군은 최대 국난이었던 6·25전쟁을 극복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은 최고 영웅”이라며 “친일파 프레임으로 백 장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법적 근거 없이 국립묘지 설치 목적에 맞지 않는 사항을 임의로 기재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안장자의 명예를 지켜나감으로써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 단체인 광복회는 이날 오후 보훈부 결정에 반발했다. 광복회는 이날 성명에서 “보훈부가 법적·절차적 논의,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 없이 일방적으로 삭제한 것은 국민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성급한 판단”이라며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하며 원상복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훈부가 많은 우선순위 속의 일들은 제쳐두고 유사한 논란을 빚고 있는 다른 국가유공 호국 인사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 없이, 유독 백선엽 1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도 의도적이며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