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경북 예천에서 군의 허술한 안전 조치 등으로 순직한 해병대 고(故) 채수근 상병 사건 조사 과정에서 우리 군의 난맥상이 또 드러났다. 해병대 수사단장 측은 “해병 1사단장 등 8명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 내용을 담은 조사 보고서를 제출해 이종섭 장관의 결재까지 받았는데, 이후 신범철 국방부 차관 등이 나서 이를 번복하려 했다”며 축소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 장관은 법률 재검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돼 국방차관을 통해 지시를 하달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하급자인 수사단장은 국방장관의 명령을 어기고 사건을 경찰에 이첩하고 장관은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그를 보직해임했다. 군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계속 벌어진 것이다.
◇장관, 조사 보고서에 결재했다 번복
해병대 수사단은 지난달 30일 임성근 해병 1사단장과 채 상병 수색 작업에 관여한 중위·중사 등 상급자 8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담은 조사 보고서를 이 장관에게 제출했다. 이 장관은 국방부 허태근 정책실장, 전하규 대변인,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등이 입회한 가운데 보고서에 결재를 했다. 이에 따라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남은 절차에 따라 사건을 관할 경찰서인 경북서에 이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튿날인 31일 해병대가 예고했던 조사 결과에 대한 언론 브리핑이 1시간 전에 취소됐다. 잠시 뒤 국방부에서 사건 재검토 필요성이 있어서 일부 절차가 보류됐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 장관이 이날 조사 보고서에 대한 법률 재검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 장관은 초급 간부까지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된 보고서가 경찰에 넘어가면 경찰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보고서에 사망 사건과 업무상 과실에 대한 인과관계 입증이 충분치 않은 점도 고려됐다고 한다. 이에 이 장관이 마침 가까이 있던 해병 부사령관에게 재검토 지시를 내리고 부사령관이 이를 사령관에게 알려 박 단장에게 하달했다는 것이다.
◇수사단장, 장관 명령에 반해 이첩 강행
박 단장은 해병대 사령관이 재검토하라고 명확하게 명령한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박 단장 측 법률대리인 김경호 변호사는 “장관의 명령이라고 명확히 하달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재받은 대로 일을 진행해 지난 2일 경찰에 이첩한 것”이라고 말했다. 군법상 장관이 군 수사를 직접적으로 지휘할 권한도 없다고도 주장했다. 박 단장 측에 따르면, 김 사령관은 박 단장에게 신 차관의 휴대폰 문자라면서 ‘조사 결과에서 혐의 등을 빼고 조사한 사실관계만 넣어라’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여줬다고 한다. 이에 박 단장은 김 사령관에게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나중에 수사단과 해병대가 부실 조사 논란에 휘말리고 처벌받을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신 차관은 10일 기자들을 만나 “지난 1~2일 세 차례 김 사령관에게 전화로 장관의 재검토 지시 이행 여부를 확인은 했지만, 문자를 보낸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휴대폰 통신 내역서를 공개하기도 했다. 박 단장은 장관의 당초 결재에 따라 사건을 이첩해 ‘항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장관은 분명한 하달 계통이 진행됐다며 지난 2일 그를 보직해임했다. 군 검찰도 그를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했으며, 11일 그를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군의 난맥상 다시 드러나”
군 안팎에선 이번 사건으로 군 조직의 부실한 업무 처리 능력과 지시 계통의 기강 문제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채 상병의 사건은 군이 수해 수색 시 구명조끼 착용, 수중 활동 제한 등 기본적인 안전 규칙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젊은 병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철저히 조사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도 수사 결과를 놓고 국방부 장차관과 수사단장, 사령관 등이 얽혀 ‘항명’ ‘직권남용’ 등을 거론하며 법적 공방전을 벌이게 됐다. 전직 국방부 장관은 “하늘에서 채 상병이 이런 군을 바라보면 어떤 마음이겠느냐”면서 “대민 지원을 하다 희생된 고인의 헌신을 위해서라도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불필요한 논란도 속히 수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