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해 북·러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라고 조선중앙통신은 11일 보도했다. 같은 시각 러시아 크렘린궁도 “김정은이 푸틴 대통령 초청을 받아 수일 내에 러시아를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출발·도착 시간, 회담 일자 등 김정은의 구체적인 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12일이나 13일쯤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별도의 장소에서 만나 회담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의 외국 방문은 2019년 4월 북·러 정상 회담을 위해 러시아를 찾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김정은을 태운 1호 열차 ‘태양호’가 10일 오후 평양을 출발해 북동쪽 국경 지역으로 이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매우 느린 속도로 천천히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외부 이동이 한미 정보 자산에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 낮 시간대 이동은 피하고 저녁 시간대 위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평양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거리는 약 1200㎞로 시속 60㎞ 미만으로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2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김정은이 늦어도 12일 오전에는 현지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과 푸틴 대통령은 이르면 12일 만나 정상회담을 가지는 것이 유력하다. 앞서 북한 시찰단이 접경 지역을 찾는 등 사전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 포착됐는데 4년 만에 성사된 북·러 회담에서 불법 무기 거래 협상에 어떤 진전이 있을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2년째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는 바닥난 탄약고를 채워야 하고, 북한은 핵 추진 잠수함(핵잠)·정찰위성·전술핵탄두 개발 완성과 실전 배치를 위한 마지막 핵심 기술이 필요하다. 북한이 러시아에 식량을 요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난 7월 북한 ‘전승절’을 계기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방북했지만, 핵심 무기·기술 거래를 위해서는 정상 간의 직접 담판이 필요하기 때문에 김정은이 러시아행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푸틴 대통령은 12일 루스키섬 극동연방대에서 열리는 제8차 동방경제포럼(EEF) 본회의에 참석해 연설할 예정인데, 김정은은 늦어도 이날 오전에는 현지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1일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이 EEF에선 회담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른 장소나, 러시아 위성·로켓 기술 개발의 핵심인 보스토치니 첨단 우주기지, 김정은 부친 김정일이 2001년 방문해 푸틴 대통령을 만났던 하바롭스크주 등도 회담 장소로 거론된다. 각각 북·러의 군사 협력 의지와 유대를 대외에 각인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들이다. 현지 소식통은 “가능성은 낮지만 김정은이 선대 지도자들처럼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따라 수도 모스크바로 이동할 수도 있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김정은 맞이로 분주한 모습이 일부 포착됐다. 일본 민영 방송 네트워크인 JNN 등은 11일 “하산역 직원들이 외빈 맞이의 일환으로 역사 내·외부에 초록색 페인트를 덧바르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하산역은 김정은이 2019년 4월 북·러 정상 회담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전용 열차에서 내려 영접받았던 곳이다. 10일에는 북한 배지를 가슴에 단 시찰단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역사를 둘러봤고, 전날인 9일엔 레드 카펫(붉은색 융단)이 깔렸다고 한다. JNN은 “김정은이 열차로 러시아에 들어가기 위한 최종 점검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4년 만의 정상 회담을 통해 북·러 무기 거래가 현실화할 경우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북·대러 제재를 통해 대응 수위를 한층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10일(현지 시각) CBS 인터뷰에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행동이자 자포자기 행위의 일환이고, 북한 입장에서도 이에 응한다면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북한의 러시아에 대한 무기 지원이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이 국가들을 한층 고립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제재 가능성을 내비쳤다. 존 파이너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은 11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미 조야(朝野)에선 전직 고위 당국자들이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해 북·중·러 연대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제프리 전 NSC(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관은 VOA에 “북한은 물론 중국도 역내 핵무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주의를 동시에 끌 수 있다”며 “미국이 워싱턴선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략 핵잠수함을 기항시킨 것처럼 이런 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도 “핵잠수함이 한국군과 함께 실전 배치되거나 핵공유 협정에 한국을 포함시키면 근본적인 역학 관계가 바뀔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