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현지 시각) 북·러 정상회담은 제재 장기화와 경제난 속 활로가 필요한 북한,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고립된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성사됐다. 크렘린궁은 이날 회담 세부 내용은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공개하면 안 되는 민감한 영역에서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큰 틀에선 북한이 재래식 포탄을 제공해 바닥난 러시아의 탄약고를 채워주고, 러시아는 반대급부로 기술·식량·에너지를 제공하는 거래에 합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이번 회담이 양국 관계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김정은의) 이번 러시아 방문이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하루 최대 10만 발의 탄약과 포탄을 소모했지만, 전쟁 2년 차에 접어든 현재 재래식 무기가 바닥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러시아에 ‘무기 조달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북한밖에 없다. 북한은 최소 100만톤 이상의 탄약을 비축 중인데 옛 소련에서 기술·장비를 이전받아 생산한 것이 대부분이라 러시아제 무기와 호환이 가능하다. 100·115㎜ 전차 포탄, 122·152㎜ 자주포 포탄, 박격포용 포탄, 구식 돌격용 소총과 경기관총 등이 제공 가능한 품목들로 거론된다.
김정은은 러시아 방문 직전까지 주요 군사 공장을 집중적으로 둘러보며 무기 현대화를 강조했다. 직접 소총 시험 사격을 하고 전투장갑차를 운전하기도 했고, 지난 7월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을 땐 무장 장비 전시 현장을 함께 둘러보며 무기를 소개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은 “모든 행보가 러시아를 향한 무기 호객 행위였던 셈”이라고 했다. 러시아가 포병 전력 상당 부분을 상실한 상태라 북한군의 주체포(170㎜ 자주포)와 방사포(다연장 로켓), 9월부터 인도가 시작되는 미군 ‘M1 에이브럼스’ 전차에 대응하기 위한 대전차 미사일 ‘불새’를 요구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반대로 러시아는 “북한의 위성 개발을 도울 것”이라 했는데 이는 북한이 공을 들이고 있는 정찰위성 관련 기술 제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됐다. ‘눈’ 역할을 하는 군사 정찰위성이 있어야 유사시 미사일·드론 같은 무기를 정확히 투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2021년 ‘5대 국방 과업’ 중 하나로 지시해 2026년 완수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한은 올해 정찰위성 발사에 엔진 고장 등으로 두 차례 실패해 러시아 기술 이전이 필요한 상태다. 푸틴 대통령은 북한의 인공위성 개발을 도울 것인지 묻는 언론 질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라며 “김 위원장이 로켓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우수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 밖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에 필요한 대기권 재진입 기술 관련 도움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외교 소식통은 “김정은이 부쩍 해군력을 강조하고 있어 북·러 연합 훈련을 제안하거나 해군력 강화를 위한 러시아 측 조력을 구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북한 노동자 송출 확대 문제도 회담 의제로 거론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수행단엔 김정은의 역점 사업인 건설을 담당하는 박훈 내각 부총리가 포함됐다. 러시아는 현재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어서 최근 국경을 개방하기 시작한 북한이 외화 벌이를 위해 러시아 극동 지방에 부족한 노동력을 대거 지원할 수 있다. 북한 노동자의 해외 파견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지만 러시아 당국은 코로나 직전까지도 수만 명에게 노동 허가증을 발급해 왔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러가 군사 협력 확대를 시사했지만 러시아가 핵 추진 잠수함(핵잠) 같은 핵심 기술을 이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러시아가 우방에 핵심 기술을 이전한 사례가 없다”고 했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KBS에 출연해 “북한이 똑같은 기술을 제3국에 판매할 수도 있어 기술 이전이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북한에 핵잠을 제공할 경우 냉전 이후 지속된 미국과의 핵 균형을 깨는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로선 상당한 후폭풍을 감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