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번역 외서(外書)를 가장 먼저 읽고 이야기[說]해드리는 국내 유일의 뉴스레터 ‘외설(外說)’의 노석조(盧錫祚·41) 기자입니다. 일주일에 최소 1번(매주 수요일) 외설을 전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받아보시려면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4 로 들어가셔서 이메일을 남겨주시거나 제 이메일 stonebird@chosun.com나 휴대폰번호 010-2922-0913에 여러분의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세요.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외설 독자님들,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서 부모님을 뵈러 6시간 동안 차를 몰고 내려갔다 며칠 지내다 올라왔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인 3일은 저희 서울 집에서 멀지 않은 처가의 장인 장모님께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장모님이 차려주신 푸짐한 밥상을 한껏 즐기고 건넛방으로 넘어와 책상에 앉아 바로 이 뉴스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 레터를 보시는 독자님들은 저보다 더 연휴 잘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어느덧 시월입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고요.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세 가지가 떠오릅니다. 이번 달에 있는 제 생일(^_^),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과일인 감과 홍시, 마지막으로 노벨상입니다. 매년 시월초만 되면(예외도 있습니다) 각 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되고 전 세계 모든 매체가 그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합니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는 오는 10일 난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신문이나 TV에서 올해는 노벨물리학상이 누구에게 돌아갔다고 하는 뉴스를 보고 자랐습니다. 저는 1982년생인데요, 고3 때인 2000년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빅뉴스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 사회부를 거쳐 지금의 정치부에 오기 전까지 꽤 긴 시간인 6년여간 국제부에 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는 시월이 다가오면 올해는 누가 노벨평화상을 받을까 예측해보거나 저 나름대로 수상자를 선정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하여 과학분야는 감히 넘보진 못하고요.
◇지난달 타계한 노벨 간부의 마지막 육필
여기에서 올해 누가 받을 것 같다는 제 감 같은 걸 감히 독자님들께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연휴 기간 시월 첫주 ‘외설’을 위해 흥미롭게 읽은 외서 한권을 ‘언박싱(unboxing)’하려고 합니다. 바로 노벨평화상을 운영하는 ‘노르웨이 노벨재단(Norwegian Nobel Institute)’에서 1990년 1월 1일부터 2014년 12월 31일까지 꼬박 25년간 재단 사무국장 등을 지낸 게일 룬데스타드(Geir Lundestad)의 저서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노벨평화상 내막 이야기(The World’s Most Prestigious Prize: The Inside Story of the Nobel Peace Prize)’입니다.
노르웨이 역사학자인 룬데스타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노벨위원회(Norwegian Nobel Committee)의 사무총장도 지냈습니다. 노벨평화상 사무·운영 총괄을 맡는 공식 재단, 그리고 이 재단이 관리하는 노벨위원회 등 양 기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인 것입니다. 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의회가 선정한 5명의 위원(임기 6년)으로 구성돼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뽑는데요, 룬데스타드는 이들 위원들을 총괄 관리하는 사무총장(secretary)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은 룬데스타드가 올해 9월 22일 향년 78세로 별세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입니다. 노벨재단과 위원회 내부자가 노벨상에 대해 쓴 책으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가 2019년 9월 12월 영문으로 펴냈으며 총 237쪽 분량입니다.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외서입니다. ‘노석조의 외설’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미번역 신간 외서를 소개해드립니다. 번역서는 이미 국내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한국어로 읽고 서평 기사를 쓰고 있으니까요. 저는 다른 기자들이 하지 않은 부분을 책임지려 합니다.
◇정치성향은 극과 극…'꿈’과 ‘깡’은 다들 있더라
룬데스타드는 노벨평화상과 함께한 지난 25년간 수상자 모두를 예외 없이 아주 가까이서 접했다고 합니다. 저서에서도 이 부분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가 겪은 수상자들은 정말 하나같이 다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름의 분류를 내놓습니다. 수상자 일부는 정치적으로 왼쪽(political left)에 속했는데, 이에 비해 정치적 우파(right)는 다소 적었다(somewhat fewer)고 분석했습니다. 정치적 좌파가 우파보다 노벨평화상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정치적 좌파·우파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버락 오바마(2009년 수상) 전 미 대통령, 중국 반체제 운동가이자 작가인 류샤오보(劉曉波·2010년 수상), 김대중 대통령(2000년 수상), 이란의 여성·아동 인권 운동가인 시린 에바디(2003년 수상) 등을 각각 정치적 좌파로 봤을까요? 우파로 봤을까요? 류샤오보는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맞서는 극좌파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나 서방 자유민주 진영에서는 좌파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우파에서 강조하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에 맞닿은 인물입니다. 실제로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한국 좌파보다는 우파에서 그의 투쟁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룬데스타드가 말한 정치적 좌파라는 것은 ‘인권’과 ‘평화’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위해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진(挺進)하는 사람들, 그것이 옳다고 하는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1989년 수상),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1990년 수상) 대통령, 1994년 공동 수상한 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시몬 페레스 당시 외무부 장관 등도 어떤 기준이냐에 따라 좌·우 성향이 엇갈릴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룬데스타드는 이렇게 수상자들이 각양각색이었지만 다들 이 두 가지만큼은 거의 다 공통되게 지니고 있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바로 ‘비전(vision)’과 ‘정치적 용기(political courage)’입니다. 다른 말로 ‘꿈’과 ‘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 삶에서 꼭 이루고 싶다는 ‘비전’만큼은 꼭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 비전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상당한 정치적 용기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 일부는 아주 어려운 환경에 직면했다. 개중 아주 일부는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노르웨이 오슬로에 올 수조차 없었다.”
정치적으로 좌파든 우파든, 뭐든 간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꿈’이 있었고, 바로 그 꿈을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설사 죽을 위기에 처했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맞서는 ‘용기’, 즉 ‘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미얀마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1991년 수상)는 오랜 기간 가택 연금을 당하고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미얀마를 민주주의와 인권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용기’있게 군부 정권에 맞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노벨상을 받은 지 25년 뒤인 2016년 기적적으로 미얀마의 정치 환경이 바뀌어 그는 국가고문, 외무부 장관에 올랐는데요. 하지만 그는 막상 국정 운영의 책임자가 된 이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불교 신자 등을 의식해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국가 탄압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해 그의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 동문들이 ‘노벨평화상’ 박탈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로힝야족 박해 상황은 그가 당초 추구하던 ‘비전’인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정치적 기반을 잃을 것이 우려돼 로힝야족 탄압에 대해서는 미온적으로 나온 것은 ‘용기없는’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아웅산 수지가 국가고문, 외무부 장관이지만 실상은 군부가 여전히 실권을 쥔 정치적 현실 때문에 로힝야족 사태에 적극 개입 못 한 것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아웅산 수지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연금 상태여서 시상식에 가지도 못했고, 남편이 1999년 영국에서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날 때 같은 이유로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시 군부와 현실적 타협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대의’를 지키기로 했고, 그것이 세계를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가 현실 정치에 몸을 담은 뒤에도 ‘대의’를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굳세게 지키고자, 인권을 중시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하게 냈더라면 지금과 같이 평판이 땅에 떨어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현재 그는 2021년 쿠데타로 다시 군부에 구금된 상태인데요, 이미 대쪽 같은 인권 투사라는 이미지가 까맣게 얼룩져 그의 구금 소식조차 국제사회의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리와 대의, 둘 다 잃은 셈입니다. ‘비전’과 ‘용기’를 갖고 산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상에 오르고 난 뒤에도 변질되지 않고 초심을 잃지 않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수상 소식 가장 기뻐했던 DJ…80년대 하버드에서 알게 돼
룬데스타드는 노벨평화상 사무국 간부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수상자 발표 전에 그 결과를 먼저 알고 수상자에게 알려주는 아주 영광스럽고 가장 기분 좋은 일을 도맡고 했다고 합니다. 책에 전화로 “당신이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됐습니다”라고 전했을 때의 수상자들의 반응을 책에 고루 남겨놨는데요. 그는 “수상 소식을 알렸을 때 실망을 표한 수상자는 단 한명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들 엄청 좋아했다는 것이죠.
다만 베트남 공산당 부장이었던 레득토(黎德寿)만큼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또는 파리 평화협정)을 이끌어낸 공로로 미국 헨리 키신저 국무부 장관과 함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는데요. 결국 레득토(1911~1990)는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면서 말이죠. “베트남에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다.” 당시 평화협정으로 북베트남, 남베트남이 표면적으로 휴전하긴 했지만, 전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기에 상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협정 이후 주월 미군과 주월 한국군 등 남베트남에 주둔한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했고 2년 만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수도인 사이공(현 호찌민)을 점령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은 패망했습니다.
룬데스타드는 가장 수상 소식을 기뻐했던 수상자로는 다름 아닌 고(故) 김대중(DJ) 대통령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undoubtedly)’면서 꼽았습니다. 오랫동안 간절하게 바랐던 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르바초프, 아웅산 수지, 넬슨 만델라, 야세르 아라파트, 코피 아난, 지미 카터 등과 대등하게 별도로 DJ의 수상 관련 스토리를 정리했습니다.
룬데스타드는 DJ에 대해 1900년 노벨재단이 설립(첫 수상은 1901년)된 이후부터 자신이 2014년 재단을 떠날 때까지 114년 이래 가장 기쁘게 상을 받은 사람은 DJ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제 분쟁 해결 노력 공로의 지미 카터(2002년 수상) 미 대통령과 무담보 소액 대출로 빈곤퇴치 운동을 한 방글라데시 무함마드 유뉴스(2006년) 그라민 은행 설립자가 DJ의 뒤를 잇는다(close on his heels)”면서 말이죠. 미국 홀로코스트 작가인 엘리 위젤(1986년 수상)도 아주 행복한 반응을 보였던 인물로 꼽힌다고 했습니다.
룬데스타드는 “DJ는 수년간 노벨평화상 수상의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했었다”고 했습니다. “수상은 그에게 꿈이 실현된 것(a dream come true for him)이었다”고 했습니다. “통상 수상자들은 감정을 처음에는 자제하는데, DJ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입이 저쪽 귀에서 이쪽 귀까지 걸릴 정도로 웃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룬데스타드는 책에서 DJ가 1925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공부하고 6·25전쟁 때 북한에 잡혔다가 탈출한 스토리부터 그가 몇번의 도전 끝에 국회의원이 됐다가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암살될 뻔한 위기 등을 딛고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그렸습니다.
DJ의 정치 역경은 사실 다 알려진 얘기이고 룬데스타드 책보다 한국에서 더 자세히 보도가 된 것들인데요, 책에 그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도 있었습니다.
바로 룬데스타드와 DJ가 1980년대 초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점입니다. DJ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여행도 가능해져 1982년 미국으로 갔을 땐데요. 당시 DJ는 하버드대 국제관계 센터에 펠로우로 적을 두고 있었고, 룬데스타드는 1983년 여름학기 때 하버드에 머물다 DJ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룬데스타드 약력을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보니, 그는 오슬로대와 트롬쇠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노벨 재단에 1990년 들어가기 전까지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1978~1979년 그리고 다시 1983년 하버드에서 리서치 펠로우로 두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DJ와는 두 번째 연구기간 만난 것입니다.
룬데스타드는 “당시 우리 모두(하버드 펠로우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DJ의 민주주와 인권에 대한 투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그와 소통하는 건은 쉽지 않았었다”면서 “그의 영어 실력이 아주 좋지는 않았다(not very good)”라고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 햇볕정책이 결정적
DJ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의 공로가 가장 큰 이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니 이런 부분만 고려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DJ가 미얀마 군부 정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독립에 목소리를 보탠 것 등이 참작됐다고 했습니다. 반면 DJ의 대통령 재임기 여전히 정치범 구금자들이 존재했고, 노동권 관련된 부적절한 이슈가 많았던 점 등은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군나르 베르예 노벨위원회 위원장이 DJ와 관련한 발표 때 직접 이런 부분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여러 노르웨이 노동조합이 노벨위원회에 연락해와 한국의 부적절한 노동자 권리문제를 지적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룬데스타드는 재차 DJ가 상을 받은 이유 두 가지를 정리해 설명합니다. 첫째는 오랜 기간 고집스러운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헌신이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이게 중요한데요, 바로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룬데스타드의 표현대로 그대로 옮기자면, 햇볕정책은 DJ를 ‘많은 좋은 후보자들 중 하나(one among many good candidates)’에서 바로 ‘그 후보자(the candidate)’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사실 세월이 지난 지금이야 ‘햇볕정책’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벌어졌는지 현재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돼 한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햇볕정책은 정책 이름부터 주목을 끌었습니다. 1970년대 서독이 추진했던 ‘동방정책(Ostopolitik)’과 비견되며 국제적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햇볕정책이 DJ를 노벨평화상 수상자 반열에 다가가게 한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룬데스타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0년 6월 DJ와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평양 회담은 ‘하이라이트’였다. 그 정상회담은 DJ에게 큰 업적(대성공·triumph)이었다. 그는 수년간 한 명의 노별평화상 후보자였었다. 그런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가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해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He had been a candidate for the Peace Prize for many years. It was no coincidence that he received the Peace Prize the year the summit took place).”
◇DJ, 오슬로에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책에는 국내에 안 알려진 에피소드가 두 개나 더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방송과 신문 기사 검색을 여러 번 했는데, 나오지가 않더군요.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란 별칭을 가진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모르셨던 건가 봅니다.
바로 DJ가 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에 왔을 때의 이야기인데요. DJ는 그가 머물 방의 온도가 최소 27도 정도로 따뜻한 상태로 유지되기를 아주 각별히 요청했다고 합니다. 수행 요원은 항상 DJ가 방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와서 방의 온도가 제대로 됐는지는 체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해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룬데스타드가 참석한 것 중에 가장 ‘따뜻한’ 시상식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재밌는 것은 DJ가 훈훈한 공기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고(故) 이희호 여사가 룬데스타드에게 “사실 난 20도 이상 더운 건 좋아하지 않아요”라면서 DJ의 까다로움(?)에 대해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룬데스타드는 “이희호 여사가 꽤 괜찮은(passable) 영어를 구사”한 것으로 기억했습니다.
이런 이 여사에게 룬데스타드는 “우린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면서 “난 20도를 좋아하는데 내 아내는 25도 이상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 바꾸기(a wife swap)’를 해서 따뜻한 사람들끼리같이 있게 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그랬더니 이 여사가 막 웃었다고도 합니다. 감히 일국의 퍼스트 여사에게 ‘배우자 스왑’이라는 아주 발칙하고 무례한 표현과 제안을 한 것도 놀랍지만, 그럼에도 웃어넘긴 이 여사도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룬데스타드가 지난달 별세해 이희호 여사와 DJ가 계신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텐데 셋이 만나 담소를 나눴을지 상상을 해봅니다.
또 하나의 비사는 ‘엘리베이터 안전사고’입니다. 시상식은 성악가 조수미씨가 ‘아리 아리랑’을 부르며 아주 성황리에 전행이 됐다고 하는데요. 아주 기이한(peculiar) 사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DJ와 이희호 여사, 룬데스타드, 그리고 경호 요원이 노벨재단에 왔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혀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엘리베이터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사전에 엔지니어를 불러 점검까지 했었다고 하는데요. 이후 한국 측 수행원도 와서 살펴봤었고요. 그런데도 막상 이용할 때 고장이 생겨 20분 동안이나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었다고 합니다.
◇인구 많은 아시아에서 수상자 많이 나와
룬데스타드는 노벨평화상과 관련된 여러 잘못된 편견 가운데 하나가 미국인이나 유명 인사가 주로 많이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1990년부터 약 30년간 수상자를 살펴보면, 가장 많은 10명이 아시아에서 나왔고, 8명이 아프리카, 5명이 유럽, 5명이 북미, 3명이 중동, 2명이 라틴아메리카(남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전체 세계 인구의 60%가 아시아에 살고 있는데, 노벨위원회는 이 점을 수상자 선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절대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작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우크라이나의 시민자유센터, 러시아의 인권단체인 메모리알, 벨라루스의 알레스 뱔랴츠키 등 유럽 쪽 3명이었습니다. 2021년에는 러시아의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로 유럽 1명, 아시아 1명 등 2명이 공동 수상했고요. 2020년에는 속한 지역이 없는 유엔의 세계 식량계획(WFP)였습니다.
지난 3년간 2022년 유럽 쪽 수상자가 많았던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올해는 유럽보다는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쪽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올해는 과연 누가, 또는 어느 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인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이 될까요? 2018년에는 최초의 미북 정상회담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그리고 이 미북 회담을 중재한 문재인 전 대통령 등 총 3명이 공동 수상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현되진 않았습니다. 룬데스타드의 책에도 나오지만 노벨평화상은 수많은 인민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과 같은 독재 정권 지도자는 후보자 중의 후보자로서도 검토하지도 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2000년 DJ와 함께 정상회담을 한 김정일에게는 노벨상의 ‘노’도 주어지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당장 올해는 아니지만 언젠가 아시아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한일 관계 개선에 기여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78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협상을 벌여 역사적 갈등을 풀며 평화 협정을 맺은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처럼 말이지요. 캠프 데이비드는 노벨평화상을 낳은 묘한 공간입니다. 1994년에도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에서 팔레스타인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부 장관이 평화협상을 벌이며 중동 평화에 뜻을 모은 공로로 클린턴을 뺀 3명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 한미일 정상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말이죠.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당시 적대국으로 원자폭탄까지 떨어뜨리며 싸웠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1910년부터 일본이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패망하는 1945년까지 식민지배와 피지배 관계였던 일본과 한국.
이렇게 얽히고설킨 세 나라가 역사적 앙금을 거국적으로 풀고 요즘 국제사회의 최대 키워드인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알리는데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지난 100년, 최소 지난 70년의 세계사를 관통하는 의미 있는 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윤 대통령이나 기시다 총리나 바이든 대통령이나 제 나라에서 지지율이 워낙 낮아 이런 거사를 소신 있게 밀어붙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들 셋 모두가 그런 비전이 진짜 품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기자로서 묵묵히 기사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조선일보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이었습니다.
다음주 수요일(10월 11일)은 미 워싱턴DC 조지타운대학의 애브러험 뉴먼 교수와 헨리 퍼렐의 신작 “지하 제국: 미국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무기로 만들었나(Underground Empire: How America Weaponized the World Economy)”를 읽고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미번역 외서를 가장 먼저 읽고 풀어드리는 국내 유일한 뉴스레터 ‘외설’을 쉽게 받아보시려면 다음 웹사이트에 들어가셔서 이메일을 남겨주세요. 감사드립니다.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