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10일 “대북 유화 정책의 하나로 추진된 9·19 남북 군사합의로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정찰 활동이 제한되고 있다”면서 ‘효력 정지’ 방침을 밝혔다. 여당도 “9·19 군사합의는 북한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기대에 체결한 것”이라며 “하지만 북한은 대남 핵 선제 타격을 법제화한 데 이어 지난달엔 헌법에 못 박았으며 9·19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날 국무회의 비공개 발언에서 이스라엘 방어 전선이 하마스의 게릴라식 파상 공세에 뚫린 상황을 언급하며 “우리도 감시·정찰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黨政)이 9·19 합의의 문제점을 공식화하면서 이 합의는 발효 5년 만에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신원식 신임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들을 만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위협에 대한민국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9·19 합의로 북한 도발 징후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최대한 신속히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신 장관은 “북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찰 감시 자산으로 북한군 동향을 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도발하는지 안 하는지 안다”면서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감시·정찰 자산을 띄워서 계속 감시했다면 그렇게 안 당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기습 공격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해 군사적 우위에 있으면서도 치명타를 입었다는 것이다.
국방부 장관이 9·19 합의 관련 효력 정지 방침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정부는 그간 합의 폐기에 따른 정치적 논란이나 북한의 적반하장식 반발 가능성을 고려하며 대응 방안을 검토해 왔다. 신 장관은 “폐기는 법적 절차가 필요하지만 효력 정지는 국무회의 의결만 거치면 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합의 폐기가 바람직하지만 법적 절차나 타 부처 입장 등을 고려해 일단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남북이 2018년 합의한 9.19 남북 군사합의는 5개 분야 20개 항으로 구성됐다.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비행금지구역, 포병 사격 및 연대급 이상 야외 기동훈련 금지구역, (해상)완충수역 등을 설정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방부는 9·19 합의로 감시·정찰 자산 운용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신 장관은 이와 관련, “그때의 이야기가 잘못된 것”이라며 합의로 인해 대북 정찰 활동에 제약이 생긴 것이 맞는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공개된 2018년 6~9월 9·19 합의 남북 협상 문건을 보면, 합참은 합의 각종 사항에 대해 대북 작전에 어려움이 생긴다며 정부 협상단에 문제 제기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9·19 합의로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했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발언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여당 원내대표도 이날 처음으로 9·19 합의 폐기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날 국정감사 대책 회의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상황을 언급하며 “정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9·19 합의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므로 관련 부처는 즉시 필요한 대책을 수립하고 실시해야 한다”면서 “경제 관련 부처는 중동 전쟁이 우리 경제와 무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고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
윤 원내대표는 이스라엘 방공 시스템인 아이언 돔’이 하마스의 소나기 포격에 무력화된 점을 꼬집으며 “북한 장사정포는 시간당 최대 1만6000여 발의 로켓탄을 쏠 수 있어 북한이 하마스와 같은 게릴라식 파상공격을 할 경우 최전방 지역은 물론 수도권 방어도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고도 했다.
실제로 군은 9·19 합의로 인해 전략정찰기 등 고정익 항공기의 군사 활동이 제한돼 북한의 장사정포 동향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합의에 따라 공중에서는 MDL 기준 서부는 20㎞, 동부는 40㎞ 상공에서 전투기 등 고정익 항공기의 군사 활동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9·19 합의를 준수해왔으나, 북한은 지금까지 총 18차례 위반하며 사실상 합의를 유명무실화시키고 있다. 북한은 2020년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고, 지난해에는 소형 무인기 5대를 MDL 이남으로 침투시켰으며, 여러 차례 동해와 서해상 해상완충구역 안으로 포병 사격을 가했다. 이번에 ‘효력 정지’ 방침이 세워진 것도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해 10월 북한이 7차 핵실험 등 고강도 도발을 할 경우 9·19 합의를 파기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는 “9·19 합의는 북한이 선제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의(善意)에 기대 체결돼 국민의 안위와 직결되는 안보 합의로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면서 “북한이 9·19 합의를 악용할 경우 도발 초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우리가 먼저 합의를 파기하면 남북 긴장감이 고조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한민수 민주당 대변인은 “9·19 합의는 접경 지역의 무력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라며 “휴전선 인근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한민국”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