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9·19 남북 군사 합의 일부분을 효력 정지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2018년 9·19 합의로 설정한 지상·해상·공중 완충 구역 가운데 해상과 공중 관련 합의 사항을 우선 효력 정지해 북한의 하마스식 기습 같은 안보 불안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해상 완충 구역’은 북한이 지난 5년간 해안 포 사격, 포문 개방 등으로 3600여 회 위반해 유명무실해졌고, 공중 구역은 북한에는 없는 한미의 첨단 정찰기의 활동만 제약해 도발 징후를 사전 파악하는 데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정부는 북한이 정찰위성 발사 같은 도발을 할 경우 군사 합의 효력 정지를 공식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이날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개최된 제55차 한미 안보협의회(SCM)에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에게 9·19 합의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전하고 관련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정부는 2018년 전임 문재인 정부가 체결한 9·19 합의와 관련해 이행 실태 등 종합적 사후 점검 절차를 거쳤다”면서 “최근 ‘부분적 효력 정지 ' 방침을 정하고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미 측은 이날 9·19 관련 우리 측 입장에 대해 상당 부분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스틴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긴밀하게 협의하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정부는 9·19 합의가 문재인 정부 시기 대북 유화 정책에 따라 청와대 주도로 진행돼 제대로 된 실무 검증도 없이 체결되는 등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합참 등 작전 계통의 현장 검증 절차도 누락하고 소규모 협상단 위주로 2018년 6~9월 3개월 만에 국가 방위 태세와 직결되는 군사 분야 합의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당시 군 내부에서는 “국민 생명과 관련된 것인 만큼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왔지만, 청와대는 이를 묵살하고 합의 발표를 강행했다고 한다. 국회 법사위 관계자는 “9·19 합의는 남북관계법 제23조 제3항에 따른 국회 체결·비준 동의를 받지 않은 남북 합의서이기 때문에 같은 법에 따라 효력 정지를 하는 데도 국회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9·19 합의는 ‘북한은 같은 민족인 한국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선의에 바탕을 두는 등 구조적 문제점도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합의가 선제공격하는 북한에 유리하고, 막아야 하는 우리로선 불리한 구조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군은 이 합의에 따라 지난 5년간 백령도·연평도 등 서북도서에 배치된 K9 자주포, 비궁 등 주요 화기를 현장에서 사격 훈련조차 할 수 없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때와 같은 북한의 해상 도발을 예방하고 대비하기 위한 우리 해군의 해상 기동 훈련도 제한됐다. 당시 정부가 북한 요구를 대폭 수용해 북방한계선(NLL) 기준 이북 50km, 이남 85km인 초도~덕적도 수역을 완충 수역으로 정하고 “포 사격·해상 기동 훈련 중지, 해안포·함포에 포신 덮개 설치, 포문 폐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병대 연평부대 등은 지난 5년간 서북 도서 배치 화력 무기에 대한 사격 훈련을 최소 수준으로 줄여야 했다. 훈련을 하더라도 대형 화기를 화물선에 싣고 경기 연천·경북 포항 등 최장 수백km 밖으로 원정을 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했다.
하지만 북한은 지난 5년간 서해 완충 수역을 향해 110여 회에 걸쳐 포 사격을 하는 등 총 3600여 회 합의 사항을 위반했다. 북한은 또 합의 이후에도 대남 타격용 전술핵 탄두 ‘화산-31′을 개발하는 등 핵·미사일 고도화 정책을 지속했다. 정부 소식통은 “9·19는 북한이 합의 사항을 반복해 어기며 지킬 의지가 없다는 게 명백해도 이를 처벌할 조항이나 이전 단계로 돌릴 수 있는 ‘스냅백(Snap back)’ 조항이 전무하다”면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9·19 합의 사항 가운데 일부는 효력 정지할 필요가 있다는 데 관계 부처 간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가 지난달 7일 기습적으로 로켓·미사일을 수천 발 퍼붓고 패러글라이딩 등으로 이스라엘 시가지에 침투한 상황도 이번 합의 부분 일시 정지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 SCM 전야 만찬에서 오스틴 장관 등 미국 측에 “북한이 오판해 하마스식 기습 공격을 포함한 어떠한 도발을 감행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단호히 응징할 수 있는 한미 연합 대비 태세를 유지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정부는 북 도발에 대한 안전핀은 1953년 정전(停戰)협정이 유일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한미 장관은 이날 SCM에서도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동안 6·25전쟁의 모든 당사자가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가 먼저 9·19 합의를 폐지할 경우 북한에 도발 명분을 줄 수 있어 ‘일부 효력 정지’ 방안을 고안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