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일 때인 작년 4월 대전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해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살펴보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조선일보)

윤석열 대통령은 10일 보도된 AFP통신 서면 인터뷰에서 “앞으로 네덜란드를 비롯해 미국, 일본 등 주요국과 반도체 협력을 대폭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위해 11일 출국해 3박 5일 일정으로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 ASML 등을 방문한다.

윤 대통령은 “신흥 기술을 둘러싼 국가·지역 간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는 상황”이라며 “반도체 협력은 이번 순방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이라고 했다. 양국 간 반도체 교역·투자를 강화하는 ‘반도체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 이번 순방 목표라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윤 대통령은 특히 “ASML 방문은 한·네덜란드 반도체 동맹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오는 12일(현지 시각)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주요 기업인들과 펠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를 방문한다. ASML은 극자외선(EUV)을 이용해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 기업으로, 이 장비 없이는 초정밀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다. 한국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공급의 약 60%를 차지한다. 업계에선 “메모리 분야 최강국인 한국과 반도체 장비·설계 분야 강대국인 네덜란드 간 ‘반도체 동맹’이 상당한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는 한·네덜란드 협력 관계의 중심축”이라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룰 더욱 체계적인 제도적 틀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양국은) 경제가 안보이고, 안보가 경제인 시대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며 경제 안보 분야 파트너십 강화 방안을 최우선 과제로 논의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내에)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13일에는 헤이그로 이동해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회담을 갖고 반도체 협력을 중점 논의한다. 또 양국 기업인 200여 명이 참석하는 한·네덜란드 비즈니스 포럼에도 참석한다. 대통령실 김수경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네덜란드와의 반도체 동맹 구축을 위해 반도체 대화체 신설, MOU(양해각서) 체결, 공동 사업 발굴 협의 등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이날 반도체 협력을 넘어 ‘반도체 동맹’을 부각하고 나선 것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등 신기술 확보를 위한 국가 간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기술 패권 경쟁, 공급망 재편 등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며 “반도체가 산업, 기술, 안보 측면에서 전략 자산으로 부각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반도체 산업의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은 (국가의) 핵심 이익과 직결된다”고 했다.

이와 관련, 한국과 미국은 지난 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제1차 차세대 핵심·신흥 기술 대화’를 열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위해 ‘반도체 기술 센터’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설립을 추진 중인 한국 첨단반도체기술센터(ASTC)와 미 상무부가 만들고 있는 미국 국립반도체기술센터(NSTC)의 협업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관 연구 기관들을 연결해 우수 사례를 공유하고 연구·개발 우선순위를 작성하는 등 심화된 협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미 차세대 핵심·신흥 기술 대화는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합의에 따른 것으로, 국가 안보 측면에서 핵심·신흥 기술 관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마련됐다. 회의를 주재한 조태용 국가안보실장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미 동맹이 군사, 경제에 이어 기술까지 포괄하는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한미는 반도체뿐 아니라 바이오, 인공지능(AI), 배터리 및 에너지 기술, 양자(퀀텀)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실질적인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미국 국립과학재단 간 2024년 신규 협업을 개시하기 위해 최소 100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의약품 공급망 강화를 위해 양국 정부와 제약사가 함께 하는 1.5트랙(반관반민) 형태 회의를 내년 개최하기로 했다. 양국은 AI 국제 논의를 선도하기 위해 양국 간 실무 차원의 워킹그룹도 만들기로 했다.

양국은 내년에 인도까지 포함해 한·미·인도 간 핵심·신흥 기술 대화를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조태용 실장은 “복합 위기 상황에서 지정학의 미래는 각국의 기술과 혁신에 달려있다”고 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양국이 동맹국으로서 공동 연구 등 핵심 신흥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 나가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