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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무솔리니 총리가 연설 중 주먹을 들어올리는 모습.

88년 전인 1935년 10월 3일 새벽 5시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가 이끄는 이탈리아가 전쟁 선포도 없이 기습적으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습니다. 189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제1차 침략 전략을 벌였다가 실패한 지 40년 만의 재도전이었습니다.

1차 전쟁 때는 이탈리아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에티오피아에 군수 물자는 물론 각종 포를 지원해 에티오피아가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는 전황을 표시한 지도.

하지만 이탈리아가 재도전할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종식되고 17년이 지난 상태로 유럽 등 국제사회는 각자도생하기 바쁘던 시기였습니다.

국가주의·전체주의 체제를 표방한 무솔리니는 아프리카의 대국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에티오피아를 식민지화할 야욕을 품었습니다. 과거 한번 실패했지만 자신은 성공시켜내겠다고 했습니다. 국가주의를 지지하며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아달라는 파시스트 지지층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제난이 심했습니다. 1930년대 초,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이탈리아 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불안정으로 무솔리니 정부에 대한 불만은 날로 커져갔습니다. 인권 탄압 등에 따른 정치적 반발도 심해졌지요.

이런 내부 문제를 타개하고자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고 전쟁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고, 병력도 늘려놓은 상태였습니다. 반면 먹잇감인 에티오피아는 국내 정치 불안으로 군은 오합지졸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이때가 기회라고 봤습니다. 국제사회도 별 제지를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식민지인 소말릴랜드 간 분쟁을 문제 삼아 사전 경고도 없이 바로 쳐들어갔던 것입니다. 독재자였기에 전쟁은 무솔리니가 마음먹기에 달렸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919년 기획해 1920년 설립된 국제기구 ‘국제연맹’이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유엔을 탄생시킨 전신이지요.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의 불법 침략 전쟁을 규탄하며 경제 제재(sanction)를 가했습니다. 지금은 대북 제재, 대이란 제재, 대러시아 제재 등으로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된 ‘제재’이지만, 당시로써는 아주 신선한 조치였습니다.

국제연맹 회원국들은 이탈리아에 대한 무기와 전쟁 관련 각종 물품의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이었죠. 이탈리아에 대한 대출과 신용 거래도 금지됐습니다. 전쟁 자금줄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탈리아산 상품의 수입을 받지 않기로 회원국들을 뭉쳤습니다. 석유 통제 등 결정적인 몇 가지 사항은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로선 큰 부담이자 국제적 압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연맹의 제재 조치는 무솔리니의 야욕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독일 등 일부 국가들로부터 각종 자원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무솔리니 입장에서는 이 전쟁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이 전쟁이 아니면 살 길이 없었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유일한 타개책이자 살길이라고 판단돼 정치적 목숨과 생물학적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는데, 경제 제재를 해서 당장 경제적 불편함과 손해가 생긴다고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경제 제재는 당장 무솔리니와 같은 국가 수뇌부보다는 일반 주민들에게 영향을 많이 줬습니다. 국가·전체주의자인 이들에게 인민의 어려움은 뒷전이었습니다.

무솔리니는 전쟁을 멈추지 않고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7개월 만인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유럽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을 낳았다는 쉬바 여왕의 후예이자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히브리어·아랍어와 같은 셈어계인 암하라어(語)를 쓰고 고유의 문자를 가진 에티오피아는 그렇게 무솔리니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연맹의 위상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파시스트의 일방적인 침략 전쟁을, 이런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발족한 국제연맹이 온갖 제재 수단을 동원해 막으려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고 막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경제 제재의 약발이 신통치 않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제재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제연맹, 그리고 국제연맹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나라들에 대한 대표적인 처벌 수단이었던 ‘경제 제재’가 별로 아프지 않다는 인식이 다른 전체주의 국가 사이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독일과 일본은 무솔리니의 승리를 바라보며 국제법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1940년 6월 독일 뮌헨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왼쪽)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와 동맹을 맺고 1943년 체포될 때까지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위키피디아

실제로 이 전쟁을 계기로 이탈리아와 독일은 ‘절친’이 됐습니다. 국제연맹이 이탈리아를 제재할 때 다른 나라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챙겨준 나라가 독일이었습니다. 무솔리니와 독재자인 나치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요즘 말로 ‘케미’가 잘 맞았습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간 ‘브로맨스’가 형성됐습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벌인 7개월 동안 이탈리아가 펼칠 전쟁 전술과 전략은 당시 제국주의의 꿈을 꾸는 많은 나라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또 이 전쟁에 투입된 새 무기들도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일종의 무기 검증의 장이 됐습니다.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서막이자 전야제였습니다. 당시는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는데다, 그 여파인지 나치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그리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까지 전체주의 지도자들이 부상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무솔리니가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승전가를 울린 것입니다. 이는 직간접적으로 나치 독일에 ‘전쟁의 영감’을 줬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경제적 정치적 ‘제재’에 놓인 독일은 이를 갈고 갈다가 전쟁으로 폭발해버렸던 것입니다.

미 코넬대 멀더 교수의 저서 '경제 무기'. /노석조 기자

국내 미번역 외서(外書)를 가장 먼저 독파하고 해제(解題)하는 국내 유일무이한 조선일보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外說)은 미 코넬대의 니콜라스 멀더(Nicholas Mulder) 교수의 저서 ‘경제적 무기 : 현대 전쟁의 수단으로서 제재의 부상(The Economic Weapon: The Rise of Sanctions as a Tool of Modern War)를 읽고 19일 이러한 제재의 흑역사에 대해 설명해드렸습니다.

멀더 교수는 이 책에서 제재의 기원부터 제재의 현재를 기술하며 제재의 좋고 나쁜 양면을 보여줍니다.

경제 제재라는 것이 과거에는 전쟁 중에 싸우는 대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식량 보급선을 끊고, 물리적 봉쇄 작전으로 고립해 말려 죽이는 식으로 전개됐지만, 약 100년 전 제1차 세계 대전 말기부터는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합니다.

평시에 전쟁을 막기 위해 과거 전쟁의 수단이었던 ‘경제 제재’를 활용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경제 제재는 군사적 조치와 달리 물리적 행위가 거의 없고 특히 군이 동원되지 않기 때문에 평시에 행사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강압적 수단’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때는 국제연맹의 회원국이 지금의 유엔처럼 많지 않은 등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지금의 유엔은 6·25전쟁 때 유엔군을 대한민국에 파병한 사례도 있는 등 이전과는 괄목할 만큼의 발전을 이뤘다고 강조합니다.

이란 수도 테헤란 외곽에 위치한 이란 이슬람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묘지 앞에서 열병식이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제 첨단 방공미사일인 S-300미사일의 모습. /이란통신

이란 호메이니 정권에 대한 제재, 대러시아 제재, 특히 대북 제재 등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이뤄져 지금도 이들의 도발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경제 제재’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제재라는 것이 괜한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법 핵·미사일 개발 등으로 이란 정권에 대해 제재를 가했지만, 이로 인해 수출입이 통제돼 이란 주민들이 궁핍한 삶을 살지만 정작 정말 제재의 채찍을 맞아야 할 이란 고위층은 캐비어를 즐기고 두바이에 고급 빌라를 여러 채 두며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선 오히려 제재의 덕을 보며 틈새 비즈니스로 배를 불리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두 번째로는 제재가 폐쇄적이고 파시스트 같은 정권에는 이들의 성장을 억누를 수는 있지만, 이들이 모든 걸 건 군사적 도발을 가로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가 이런 점을 도드라지게 부각하진 않았지만, 읽다 보니 제재가 이대로 가선 안 된다는 우려가 느껴졌습니다.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전쟁 사례를 조명해 이번 뉴스레터에서 소개 해 드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북한이 지난달 21일 정찰위성을 발사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북한이 지난달 21일 군 정찰위성 ‘만리경’을 발사체 ‘천리마’에 실어 발사했습니다. 만리경은 우주 궤도에 안착해 지구를 돌며 정찰 사진을 찍고 있다고 합니다. 구글 위성사진보다 못한 수준이라곤 하지만 어찌 됐든 우주 궤도에 위성을 만들어 올린 것은 이들이 계속 군사력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북한은 이달 17일에는 대남 타격용으로 회피 기동이 가능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1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습니다. 다음날인 18일에는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하고 고체 연료 기반으로 액체 연료 주입이 필요 없어 기습 발사를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을 동해상으로 시험 발사했습니다.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 발사 장면. /노동신문 뉴스1

북한은 73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을 한 정권입니다. 그때 정권이 3대 세습을 통해 아직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한 것도 6·25에서 적화 통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언젠가 재시도하겠다는 발로(發露) 일 것입니다.

온갖 제재에도 김정은은 3억원대인 신형 벤츠 마이바흐로 차를 바꿔 타서 다니고 있고, 그의 딸은 ICBM 발사 등 군사 훈련 현장에 프랑스 명품 크리스천 디올의 후드, 모피 재킷을 입고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막기 위한 것이 주목적인 이른바 ‘고강도 제재’는 계속되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북한은 정찰위성을 쏘고 1년에 수십 차례 탄도미사일 도발을 일삼습니다.

제재에도 무솔리니를 뒤로 도와준 나치 독일이 있었듯 지금의 북한을 돕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세력에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재에 한계가 있다는 걸 직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답이라고 봅니다.

국제 사회의 규범을 지키지 않은 북한 등에 대한 제재는 분명 계속돼야 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도 이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 구성원 모두 그 노력을 존중하고 지지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무솔리니의 침략이 주저앉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고 제재 외의 다른 수단은 몇 가지 갖추고 더 강구해야나가야 할 것입니다.

푸틴 "미국이 대만 도발" 시진핑 "강대국끼리 손잡자"- 2022년 9월 15일(현지 시각)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대미 공동 전선을 강화하고 있는 두 정상은 “러시아와 협력하겠다”(시 주석), “대만 문제와 관련, 미국 등의 도발을 규탄한다”(푸틴 대통령)며 연대를 다짐했다. 이들의 대면 회담은 지난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이다. /타스 연합뉴스

최근 유엔 무용론이 거셉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합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유엔은 아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영국·프랑스와 함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데 안보리 결의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북한 김정은이 지난 9월 13일(현지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 로켓 조립 격납고를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안보리 결의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대북 결의를 무시하고 오히려 북한과 무기 협력을 맺고 외화벌이를 시켜주는데 어느 나라가 유엔 안보리 결의를 무리해서 지키려 하겠습니까. 1930년대 국제연맹의 위기와 2023년 유엔의 위기가 겹쳐 보입니다.

2024년은 2023년보다 더 평화로운 한 해가 될까요? 한번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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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외설’ 다시 보기

●美 전략핵잠 함장은 왜 부산 제독에게 ‘코인’을 줬나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3/12/16/SRSQXME6Y5AD3FEQT2MDFKMJ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