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2018년 12월 9·19 남북 군사 합의에 따라 북한 최전방 감시초소(GP)가 철수됐는지 현장 검증을 하면서 핵심 지하 시설 파괴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서 “북 GP 시설이 군사적으로 불능화됐다”고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장 검증에 참여했던 복수의 군 관계자는 14일 본지에 “북 GP 지하 시설이 파괴됐는지를 장비 등을 통해 실제로 검증하지는 못했고 육안으로 살피고 북한 주장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며 “‘불능화에 대한 의구심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보고도 올렸지만 묵살됐다”고 했다. 현장 검증단이 부실검증, 허위 발표 의혹을 외부에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도 “당시 77명으로 이뤄진 현장 검증단 일부에서 이 같은 보고를 올렸던 것을 확인했다”며 “북측 지하 시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북한 측 입장만 듣고 정부 입장이 ‘불능화가 달성됐다’고 나간 경위를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군 고위 관계자는 “당시 합참이 검증 결과 보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합참 측 고위 관계자와 국방부 고위 관계자 간 고성과 막말이 오가며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군 측에서는 ‘불능화가 됐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은 북한이 지난해 연말부터 복원에 나선 군사분계선 인근 11개 GP 일부에서 지하 시설을 활용하고 있는 정황을 최근 감시 자산을 통해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이 같은 신속한 지하 시설 사용으로 볼 때 지난 정부의 ‘북한 GP 불능화’ 주장과 달리 해당 지하 구역이 파괴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 전문가들은 외부로 노출된 지상 요새가 핵심인 우리 군 GP와 달리 북한 GP는 외부 감시 초소와 총안구(기관총이나 소총 같은 직사 화기를 쏠 수 있는 소규모 지하 진지)를 연결한 지하 시설이 핵심이라 보고 있다. 우리 군이 GP를 모두 파괴한 데 반해 북한은 지하 시설을 그대로 둔 채 “파괴했다”고 기만 전술을 썼다가 신속히 복원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남북은 2018년 9월 9·19 군사 합의를 체결할 당시 ‘비무장지대 내 GP가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면서 GP를 전면 철수키로 하고, 시범적으로 군사분계선(MDL)에서 남북으로 각각 1km 이내에 있는 GP 11곳을 우선적으로 철거·폐쇄 조치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12일 남북은 검증단을 각각 파견해 철거 여부를 확인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당시 현장 검증 과정에서 우리 군은 실제로 북한 GP 지하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검증단에 포함된 한 영관급 장교는 “총안구 매몰 등은 굳이 북측에 가지 않아도 우리 측 GP에서도 관측 가능한 것이었다”며 “게다가 일부 총안구는 ‘지뢰 매설 지대’가 앞에 있다고 해서 직접 관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현장 검증에 나가기 전 받았던 사전 교육에서 북측 지하 시설이 파괴됐는지 꼭 확인하라는 지침을 받았는데 현장에서는 ‘폭파로 파묻혀 있다’ ‘이곳이 지하 시설로 가는 입구인데 흙으로 막혔다’ 같은 북측 말을 듣고 따로 검증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당시 현장 검증을 1시간 30분가량 만에 마쳤다고 했다. 당시 군이 배포한 현장 검증 체크리스트 자체도 ‘총안구가 불능화됐는가’ 같은 육안으로 판단할 수 있는 요식행위에 가까웠다고 한다.
북측 GP 검증에서는 우리 군의 관측 장비를 이용한 지하 시설 탐지 과정도 없었다고 한다. 군 고위 관계자는 “우리 군이 지하 시설 파괴 여부를 관측할 수 있는 지표투과레이더(GPR) 등 지하 관측 장비 휴대를 요청했으나 북이 반입을 거부한 것으로 안다”며 “결국 금속탐지기·레이저거리측정기·카메라 등만 갖고 갔다”고 했다. 다른 현장 검증 인력은 본지에 “금속 탐지기에서 지하 공간이 있다는 신호가 떠 지하 시설이 있는지 확인을 요청했지만 북측에서 진입로가 막혔다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일부 언론은 ‘내시경 장비로 확인했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지만, 군 관계자는 본지에 “해당 장비는 사용한 적이 없다. 잘못된 보도”라고 했다.
군 전문가들은 당시 북한이 GP를 선제적으로 폭파한 지 20여 일 지나서 우리 검증단이 불능화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찾았던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20여 일 사이에 북 GP 지하 시설 출입구, 총안구 등을 우리 검증단이 출입하거나 관측하기 불가능할 정도로만 공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군 관계자는 “당시 ‘지뢰 지대’를 이유로 총안구를 살피지 못한 사례가 복수의 GP에서 나왔는데, 일부 우리 검증 인원은 ‘팻말이 너무 새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국방부와 합참은 현장 검증 5일 후 브리핑에서 “북 GP에서 병력과 장비가 완전히 철수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북측 GP가 감시 초소로서의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해 불능화가 달성됐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허위 발표라는 의혹 제기가 나오는 이유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본지에 “당시 GP 부실 검증 의혹이 사실인지 검증하기 위해 감사원 감사, 외부 기관의 객관적 조사, 국정조사도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당시 국방부에서 이 사안을 담당했던 고위 인사는 본지에 “북측에서 그렇게 폭파를 시켰는데 어떻게 GP 아래 있는 지하 구조물이 멀쩡할 수 있겠냐”며 “당시 검증은 철저하게 이뤄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 정부가 9·19 합의를 파기할 명분을 찾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군사분계선 인근 GP 시범 철수는 당시에도 형평성 논란을 일으켰다. 남측 보유 80여 개 GP와 북측 보유 160여 개 GP라는 절대적 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하게 10곳을 파괴하고 1곳은 원형을 보존키로 한 것이 일방적으로 북측에 유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청와대 NSC 상황실에서 상황 점검 회의를 갖고 “상호 간 GP 철수, 또 상호 검증은 남북의 65년 분단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이라며 “남북 모두 군사 합의에 대한 철저한 이행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