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가 우리와 공동 개발 중인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관련 내부 개발 자료를 빼돌리려다 적발됐다. 13년 전인 2011년엔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무단 침입했는데, 이번에는 인도네시아가 우리 방산 기술을 빼돌리려 했다가 붙잡힌 것이다.
방위사업청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함께 KF-21 개발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파견 기술자가 지난달 17일 개발 과정 등 다수의 자료가 담긴 비인가 이동식저장장치(USB) 여러 개를 외부로 가지고 나가던 과정에서 적발됐다고 2일 밝혔다. 현재 방사청·국가정보원·방첩사령부 등은 합동으로 기밀 유출이나 방산보호법 위배 사항이 있었는지 조사 중이다. 방사청과 KAI 관계자는 본지에 “보름째 조사 중인데 현재까지는 핵심 기술 등 국가 기밀이 유출된 정황은 없다”고 말했다.
방산 업계에서는 관계 당국의 ‘로키(low key) 모드’ 대응이 지난 2011년 국정원의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이후 인도네시아의 대처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이 나온다. 2011년 2월 16일 국정원 요원 3명이 우리 공군 훈련기 T-50 수입과 관련해 방한한 인도네시아 특사단 호텔방에 잠입됐다가 발각됐다. ‘T-50 수출 성사’를 위해 인도네시아 측 협상 정보를 빼내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형식적인 유감 표명을 했을 뿐, 자국에선 ‘별일 아닌 오해’라고 적극 진화했다.
KF-21은 총개발비 8조원대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으로, 2016년 인도네시아가 개발비 1조6000억원을 부담하기로 하면서 각종 기술을 이전받기로 했다. 인도네시아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현재까지 분담금 1조원가량을 내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향후 공동 개발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과도한 대응은 자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방사청 관계자는 이날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확보한 KF-21 기술 자료 중에 전투기의 눈에 해당하는 AESA 레이더 등 항전 장비가 포함됐다는 보도가 일부 매체에서 나오고 있는데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했다. 다른 군 관계자도 “현재까지 군사기밀이나 방위산업기술보호법에 저촉될 만한 내용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기밀이라 할 만한 핵심 기술은 없었다는 것이다.
KAI 건물 내부는 보안 등급에 따라 출입 구역이 나뉘어 있고,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첩사와 국정원 등은 인도네시아 기술자들이 많은 자료를 입수한 것으로 미뤄볼 때 KAI 내부에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도 조사하고 있다. KAI가 미국에서 이전받은 기술 중에는 미국 정부의 수출 승인(E/L)을 받지 못한 것도 있어, 미국 측이 E/L 미승인 자료 유출 가능성을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방사청 관계자는 “조사 중이어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런 반응을 두고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대응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신종우 국방안보포럼 사무국장은 “비인가 USB를 들고 출입을 했다는 것부터 상당한 기술 유출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면서도 “외교 관계 등을 고려해 지금처럼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3년 전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국정원 요원이 침입했을 때 인도네시아는 “별것 아니다”라는 반응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방에 잠입한 지 6분 만에 호텔에 남아있던 인도네시아 측 인사와 맞닥뜨리자 노트북을 건네고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특사단 관계자는 자국 신문에 “그 ‘손님’들은 자기 방인 2061호실 대신 1961호에 별생각 없이 들어갔다”고 했다. 해당 사건은 한국 정부와 무관하다는 취지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섯째로 큰 교역국인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확전을 자제했다. 숙소 침입 사건 몇 달 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T-50 16대(4억달러) 수출을 최종 계약했고, 경제 협력도 강화했다.
방산 관련 정보전은 동맹 사이에서도 문제가 된다. 우리 군은 2011년 미국이 기술 유출을 우려해 분해를 금지한 F-15K의 ‘타이거 아이’(운항 및 목표 추적 장비)를 무단 분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당시 미국 측은 우리 공군이 정비를 위해 미국으로 반출한 타이거 아이에 대해 “봉인이 뜯긴 흔적이 있다. 한국이 무단으로 분해해서 역설계한 것 아니냐”며 강하게 항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한·미 양국 합동 조사에서 분해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인도네시아는 2026년 6월까지 개발비 1조6000억원을 부담하고 시제기 1대와 각종 기술 자료를 이전받기로 했다. 한국은 2016년 KF-21 사업 시작 당시 기획재정부에서 경제성을 이유로 타국과 공동 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터키 등을 고려하다가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와 공동 개발에 나섰다고 한다. 현재 10여 명의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경남 사천에 있는 KAI에서 기술이전 교육 등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한때 30여 명에 달했지만 코로나 유행 이후로 인원이 줄었다.
KF-21은 2021년 4월 첫 시제기가 나왔고 지난해 시제 6호기까지 비행에 성공했다. 우리 공군은 2026∼2028년에 생산된 초도 물량 40대를 전력화하고 2032년까지 80대를 추가 생산해 총 120대를 도입해 퇴역한 F-4 등 노후 전투기 전력을 대체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