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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에 파견된 한국 공무원들 활동 모습을 챗GPT로 그린 이미지.

워싱턴 D.C.에 온 지 넉 달이 됐습니다. 얼마 전 제가 방문연구원으로 있는 조지타운대 월시 외교 스쿨의 미국인 교수 2명과 학교 앞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학과장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조지타운 캠퍼스를 설립하기로 했다며 한껏 고무돼 있었습니다. 미 사립대의 단순한 해외 진출 사례가 아니었습니다. 미 국무부와 조율된 국가 차원의 외교 정책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최근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외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미·중 갈등, 러·우 전쟁 등의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중간지대인 ‘글로벌 사우스’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 대외 전략뿐 아니라 K컬쳐 등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한국 지역 전공이 아닌데도 외교스쿨 교수들이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 소식까지 알고, 그의 출연작도 한두 개 봤다며 말해 K드라마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 싶어 적잖게 놀랐습니다.

놀란 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려는데, 교수가 “한국 기재부의 아무개 국장을 아느냐”고 물어왔던 것입니다. 이 교수는 워싱턴 DC의 기재부 직원들을 몇몇 안다고 말했습니다.

안 그래도 2월초부터 방문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워싱턴 D.C.에는 기재부 직원이 진짜 진짜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 사람도 아닌, 미 사립대 미국인 교수한테서도 ‘기재부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대한민국 기재부 공무원’이 워싱턴 D.C.에 많긴 많구나 싶었습니다.

넉 달 동안 살펴보니, 세계 최강국이자 한국의 핵심 동맹인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인만큼 이곳에는 한국의 거의 모든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파견돼 있었습니다. 반갑게도 저의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을 보시고 먼저 연락을 주신 부처 직원 분들도 여럿 계셨습니다.

저는 15년이란 짧은 기자 생활을 서초동, 광화문, 여의도, 용산, 그리고 해외에서만 하고 세종, 과천에서는 하지 못해 사실 다양한 부처 공무원 분들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워싱턴 D.C.에 와서 보니 여기는 ‘작은 세종시’였습니다. 산업통상부,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등 없는 부처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 거의 모든 공무원이 ‘기재부 직원은 여기에 몇명일까’ 너무나 궁금해하면서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거나 물어보거나 알아보기를 꺼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소식통은 “국가정보원도 워싱턴 D.C.에 파견된 기재부 직원 수는 모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산을 쥔 ‘공무원의 공무원’인 기재부 직원들의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삼 기재부의 권력이 대단하구나 느꼈습니다. 워싱턴 D.C. 파견 공무원들의 거주 지원비 등이 양호한 편에 속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비용을 책정하는 기재부 직원들이 가장 많이 파견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른바 ‘디엠비(DMV·Washington DC, Maryland, Virginia)’라고 하는 워싱턴 지역에 파견된 기재부 직원 수는 30명 안팎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부처가 1~2명을 겨우 파견하는 것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기재부 파견자 수가 많습니다. 이들은 월드뱅크, 미주개발은행, 국제통화기금 등 워싱턴 D.C. 소재 기관들은 물론 이 주변 대학 등에 여러 형태로 국가 지원 등을 받아 지냅니다.

2022년 수집된 국회 자료를 보면, 고용휴직·국외훈련·해외파견 중인 공무원은 총 818명입니다. 이 가운데 기재부 직원은 80명(9.8%)으로, 가장 많은 수입니다. 2위인 산업부(48명)하고도 2배 가까이 차이 납니다. 3위는 행정안전부(43명), 4위 국토교통부(40명), 5위 특허청(37명) 등의 순이었습니다.

파견 형태 가운데 고용휴직이란 게 있습니다. 고용휴직은 해외 국제기구 등에 임시 채용돼 근무하고 경력을 인정받는 제도입니다. 인건비는 해당 국제기구에서 부담하지만 각 정부가 출연한 국제분담금 재원을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큰 혜택을 받는 고용휴직 인원은 전체 178명인데 이 중 41명(23%)이 기재부 소속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알아보니, 해외 파견 기재부 직원 총 80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42명이 미국과 캐나다에 몰린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프랑스, 독일 등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다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42명 가운데 워싱턴 DC에는 몇 명이 있는지는 ‘기밀’ 수준으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미니 세종시’에서 비밀이란 건 없습니다. 42명 가운데 캐나다 파견자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미국이고 이 중 다수는 워싱턴 DC라고 합니다. 2000년대 초반 워싱턴 D.C. 소재 한인 성당에만 기재부 직원이 18명이 출석해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약 20년 전 상황이니, 지금은 최소 20명에서 30명 안팎의 기재부 직원들이 포토맥 강 주변에 살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부처는 없습니다만, 기재부는 각 부처의 예산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부처 내에서 독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재들이 몰립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기재부는 공무원 해외근무·연수 기회를 ‘독식’하고 있다는 괜한 오해를 받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불투명하게, 방만하게 해외 근무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면, 재점검해서 다른 부처의 유능한 인재들에게 기회가 고루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안) 사태 이후 워싱턴 D.C.에는 미 의회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현대, SK, LG 등 한국 기업은 물론 각국 대기업들이 사무소를 신설 또는 확장했습니다.

트럼프 재판 뉴스만 보면, 미국이 막장 정치 싸움만 하는 것 같지만, 워싱턴 D.C.의 터줏대감들인 미 국무부, 재무부, 펜타곤, 중앙정보국(CIA), 의회 등 국가기관과 캐피톨힐 사람들은 ‘냉전 해체 30년’ 이후의 새 시대를 경영할 새로운 국제 질서를 짜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유럽국가들조차 미국에 불만을 표했던 IRA 같은 사태도 사실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정학적 처지를 고려했을 때 한국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워싱턴 D.C.의 동향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원수를 떠나 정부의 대미 역량은 더 커질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서울에서 워싱턴 D.C.에 와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한미 동맹’이라는 말보다 ‘미한 동맹’이라는 말을 더 자주 듣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한국은 혈맹이지만 여러 동맹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빛 샐 틈 없는 관계라고 하지만, 미국 국익이 우선하고 그것이 보장되고 나서야 미국도 한국 사정을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세종시’를 옮겨놓은 듯한 워싱턴 D.C. 주재 K 공무원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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