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휴전선 일대에서 장벽을 건설하는 정황이 포착돼 한국군 당국이 정밀 분석 중인 것으로 14일 알려졌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북한군이 동부·서부·중부 전선 일대 군사분계선에서 북측으로 1km쯤 올라간 지점을 따라 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장벽을 세우기 위한 작업을 하는 모습이 우리 측 감시 자산에 포착됐다”고 전했다. 군사분계선과 북한군 최전방 부대 철책선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며 ‘반통일(反統一)’ 정책을 천명한 이후 물리적 장벽을 설치해 남북 간 ‘국경선’ 만들기에 들어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북한의 장벽 설치 움직임과 관련해 “군은 북한군의 활동을 면밀하게 추적·감시하고 있으며 확고한 군사 대비 태세를 유지한 가운데 유엔사와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고 했다. 합참은 “북한군 활동에 대해서는 추가 분석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우리 군의 대응은 작전 진행 중인 장병들의 안전 확보를 위해 답변이 제한된다”고 했다. 군은 북한의 장벽 설치 작업을 정밀 감시하면서 그 의도 등도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북한군 10여 명이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작업하다가 군사분계선을 50m가량 남측 지역으로 침범했던 일도 이 장벽 공사와 관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북한군은 삽과 곡괭이 같은 작업 도구를 들고 있었고, 한국군의 경고방송과 경고사격 후 즉각 다시 북상했다. 북한은 장벽과 북한 내를 연결할 수 있는 전술도로도 동시에 건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지난 4월부터 군사분계선 북측에서 지뢰도 매설해왔다.
김정은은 올해 들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남북 단절 조치를 예고해왔다. 김정은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공화국 민족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며 “접경지역의 모든 북남 연계 조건들을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단계별 조치들을 엄격히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이 군사분계선 철책에 더해 장벽까지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반통일’ 지침을 선언적 의미를 넘어 물리적으로 공식화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정은은 올 들어 북한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같은 표현도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헌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북한은 평양에 있던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하고, 국가에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삼천리’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통일전선부의 명칭을 ‘노동당 중앙위 10국’으로 변경하는 등 통일을 지향하는 의미를 담은 조직 명칭도 개편했다. 북한은 자녀 이름도 ‘통일’ ‘한국’ ‘하나’로 짓지 말도록 했고, 해외 공관에 비치했던 각종 통일 관련 서적도 폐기했다.
북한이 헌법에서 ‘평화통일’ ‘민족대단결’과 같은 표현을 삭제하기 위해 이번 달 말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개헌을 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북한은 이달 하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겠다고 예고했는데, 여기에서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논의를 하고 개헌에 착수할 가능성이 크다. 통일부는 “최고인민회의 후 외무성을 통해 대남 조치를 발표하거나 경의선 단절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는 조치에 나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측이 주장해 온 ‘해상경계선’을 일방 선포하거나, 전술 도발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35년 만에 남북을 가르는 248㎞ 군사분계선 너머에 장벽이 새로 들어서면 중·러와 미국의 대립에서 싹튼 ‘신냉전’의 도래를 상징하는 ‘제2의 베를린 장벽’이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휴전선 일대 장벽 건설에 나선 것을 두고 탈북 통로 봉쇄, 물리적 장벽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해 대내외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란 분석도 한다. 특히 김정은이 장벽을 쌓아 국경을 통제함으로써 내부 지배력을 강화해야 할 정도로 북한 내부 동요가 만만치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군사 전문가는 “북한이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장벽 설치를 통해 대미 협상력을 키우려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