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지난 19일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 등 7명으로 구성된 미국 의회의 여야 대표단이 인도에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2017년 미국을 방문했던 달라이 라마가 무릎 치료를 위해 조만간 미국을 다시 방문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이에 앞서 미 하원은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티베트-중국 분쟁’ 관련 법안을 391대 26으로 가결했습니다.
미국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라이 라마에게 미국 입국 비자를 내주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달라이 라마는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전 세계 약 100개 국가를 방문했습니다. 이들 국가는 적어도 한 차례 이상 비자를 내줘 국가로서의 자존심과 체면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전 세계 10위권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사실상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달라이 라마 방한 가능성이 크게 거론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권을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중이던 2000년이었습니다.
◇이정빈 장관, ‘달라이 라마 방한’ 공론화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압박과 감시를 피해 인도로 망명하면서 그 존재가 부각됐습니다. 세계 각지를 돌면서 불교의 정신세계를 설파하고 온몸으로 중국에 항거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후,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에서도 그의 방한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됐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일보 2000년 5월 20일 자에 이런 제목의 1단짜리 기사가 나갔습니다.
<달라이 라마 방한확정, 7·10월 일정 놓고 조정>
“7월이냐, 10월 이후냐.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놓고 불교계와 정부가 구체적인 시기 확정 작업에 들어갔다. 불교계 76개 단체로 구성된 ‘달라이 라마 방한 준비위원회’는 19일, “달라이 라마 측과 협의하여 방한 일정을 7월 21~25일로 확정, 이를 정부에 공문으로 알렸다”고 밝혔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부는 10월 하순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이후로 방한 시기를 연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준비위는 “다음 주 초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지만 현재로서는 예정대로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준비위는 “달라이 라마 방한의 실무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티베트 망명정부의 동북아대표부 대사가 31일부터 6월 3일까지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대표단도 6월 14일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해 공식 초청장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준비위는 “당초 9월로 방한 일정을 잡았었지만 방문 가능 일자가 우리 추석 연휴와 겹쳐 7월로 앞당기게 된 것”이 라고 설명했다.
당시 저와 종교를 담당하던 문화부 선배 기자가 함께 취재해서 쓴 기사였습니다.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에서도 유사한 기사가 나올 정도로 김대중 정부 3년차이던 2000년은 달라이 라마 방한 가능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인권을 강조하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고, 남북정상회담도 성사되니 방한이 성사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방한은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의 발언으로 공론화됐습니다. 이 장관은 그 해 4월 중국 방문 당시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외교부장에게 “불교신자는 물론 기독교 신자까지 달라이 라마 문제를 거론하는데 국민 다수의 희망까지 저버릴 수 없다”며 “달라이 라마 문제에 대한 우리의 협조도 막바지 단계에 이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장관은 이례적으로 이렇게 ‘통보’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달라이 라마에게 방한 비자를 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은 “득보다 실이 많다”며 이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장관은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후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합니다. 이 장관을 비롯한 외교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조계종 인사들을 만나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주인도 한국대사관을 통해서 달라이 라마와 관련한 전문들이 들어왔습니다. 민간 준비위는 해외에 있는 달라이 라마 측과 연락하며 방한 성공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습니다.
◇ 중국 강하게 반대하자 기류 바뀌어
그러나 그 후, 정부 내에서 달라이 라마의 입국 관련, 아무도 책임 있는 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 내 분위기는 “달라이 라마 방한에 대해 총론은 찬성이었으나 각론은 어정쩡했다”는 게 당시 외교부 핵심 관계자의 회고입니다. 비자 발급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외교부의 아시아·태평양국의 주요 당국자들은 여름을 전후해 모두 해외공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8월엔 주중 한국 대사도 권병현 대사에서 홍순영 전 외교부 장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방한을 막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던 정부의 기류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중국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반대하고 나섬에 따라 내부적으로 이 사안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은 이미 우리 정부가 그의 입국을 허용할 경우 보복조치를 취하겠다고 통보한 상태였습니다. 우다웨이 주한 중국 대사는 국회의원들과 만나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이뤄질 경우 한·중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며 경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전후해 주룽지 총리가 10월 제3차 ASEM 참석차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아세안+3(한중일)회의,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중국 정상이 만나게 돼 있는 것도 재검토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외교부는 달라이 라마 입국 허가가 날 경우 주룽지 총리가 방한을 거부하고 나설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당시 외교부 실무진은 ‘올해에는 그의 입국이 불가능하지만, 내년 초에는 허가해줄 수 있다’는 카드를 종교계에 제시하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결국 외교부는 9월 중순에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사전 허가한 적이 없다”며 “입국 허가를 신청하면 종합적인 판단 후 최종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지난 4월 이정빈 장관이 간담회를 통해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거부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입장을 바꾼 겁니다.
당시 청와대가 방한 비용 문제로 제동 걸었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 방한에는 어느 정도 비용이 들어가는데 사례비로 거액이 지급될 경우, 마치 한국이 중국에 반대하는 망명정부를 지원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는 겁니다.
◇ “입국 허용하려면 주룽지 방한 6개월 뒤에...”
달라이 라마와 관련한 정부 내부의 논의를 가장 잘 아는 이정빈 장관은 2015년 9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그해(2000년) 10월 주룽지 중국 총리가 (ASEM 참석차) 방한했다. 함께 방한한 탕자쉬안(외교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달라이 라마의 비자 발급 문제는, 발급을 하더라도 주룽지 총리가 다녀간 지 6개월 이내에는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총리가 다녀간 지 6개월도 안 돼서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적어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자 발급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에서는 많이 후퇴한 셈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대중외교의 지렛대 하나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이후 이 지렛대를 더 이상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주룽지 총리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사실상 용인하며 6개월 뒤에, 즉 2001년에 비자를 내 주는 것은 괜찮다고 했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중국이 양해했다는 것인데, 중국을 잘 아는 ‘차이나 스쿨’ 외교관들은 이 장관이 탕자쉬안의 발언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한 관계자는 “중국 외교를 책임지는 외교부장이 달라이 라마의 방한 허용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을 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이후 우리 정부의 입장은 더욱 후퇴해 입국 허용 검토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불허하는 입장을 유지하게 됩니다.
◇한중 관계에서 좋지 않은 선례 남겨
외교부가 달라이 라마 방한에 대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후 10월에 최종적으로 ‘올해는 허용 불가, 내년 중 검토‘ 결정을 발표합니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 방한준비위는 조계사에서 ‘문화주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의 ‘내년 허용 가능’ 방침은 또 한 번의 기만으로, 진실성이 없다”며 “앞으로 국제적 압력을 조직해 나가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고 반발했습니다. 또 준비위는 12월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전에 노벨상위원회를 항의 방문하고 유럽에서 그의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달라이 라마 준비위는 11월에도 김대중 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습니다. 준비위는 “(달라이 라마 방한이 무산된) 작금의 상황이 중국의 외교적 압력 운운하기 이전에 국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 정부의 독선적 사고와,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경시한 채 굴욕적 자세로 일관한 사대주의적 외교가 그 근본 원인임을 다시 한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중국정부는 내정간섭을 중단하고, 총독 행세하는 우다웨이 대사를 즉각 소환하라”고도 합니다. 이어서 “우리는 비록 올해의 방한이 무산되었지만, 이에 굴함 없이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또 그것을 통해 우리가 뜻하고자 하였던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총력을 경주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준비위의 희망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전국 각지에서 달라이 라마 방한을 위한 법회, 서명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지만, 2000년 만큼 가능성이 크게 거론되지 못했습니다. 최근 중국의 위상이 200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진 상황에서 그의 방한을 허용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000년 달라이 라마 방한 무산 사태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민간단체의 종교 행사’라는 조건을 달아서 허용하고, 중국에는 의연하게 대응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당시 외교부의 고위관계자는 최근 통화에서 “2000년에 우리가 원칙대로 달라이 라마 방한을 한 번 정도는 받아들였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의 이런 평가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 방한의 최적기는 정권 교체기다. 물러나는 정권에서 달라이 마라 방한을 결행해 버리고 정권이 끝나면, 중국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정권 중반에 그의 방한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가 취소해버려 국내에서는 신뢰를 잃고, 중국에 약점을 잡히는 결과가 나왔다. 전략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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