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8월 수미 테리(왼쪽) 연구원이 뉴욕 맨해튼의 고급 그리스 레스토랑에서 고위 외교관으로 나온 국정원 고위 간부 2명과 식사하고 있는 모습. /미 연방검찰
그래픽=양인성

대통령실은 18일 수미 테리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미 검찰에 의해 기소된 것과 관련해 “문재인 정권을 감찰해야 될 것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국정원 요원이) 사진 찍히고 한 것이 다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전문적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요원들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우니까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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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미 검찰의 공소장과 당시 상황에 밝은 소식통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2019~2021년 문재인 정부가 ‘종전 선언’을 원하며 무리한 대미 외교를 펼친 것이 이번 사태로 연결된 측면이 있다. 미 검찰은 2019년 1월 서훈 당시 국정원장의 워싱턴 DC 방문 시, 테리 연구원이 국정원 요청으로 미 국방부 고위 당국자 등을 섭외해 ‘비공개 간담회’를 열어준 것을 문제 삼았다.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이때 문재인 정부는 종전 선언에 총력전 중이었다. 여기 참석한 전직 미국 고위 정보 당국자는 연방수사국(FBI)에 “이 만남은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싱크탱크에 초청받아 외국 정보기관 수장을 만난 다른 사례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테리가 문 정부 정책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2월 그는 언론 칼럼에서 “종전 선언은 평양과 베이징이 유엔사 해체와 종국적으로 주한 미군 철수를 요구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국정원과의 교류는 계속됐다. 국정원 A 요원은 2019년 11월 그에게 명품 코트와 핸드백을 사줬다. A 요원의 후임인 B 요원도 2021년 4월 명품 핸드백을 사줬다.

이 시기 문 전 대통령의 대학 후배인 재미 교포 C씨를 중심으로 미 의회에 대한 종전 선언 로비도 이뤄졌다. 한국 민주당 의원들과 미 의회를 연결해 준 C씨는 2021년 민주평통 미주부의장이 됐다. 이즈음 한인 사회에서는 “미국 국적자가 한국 기관 소속으로 한·미 정치권의 ‘가교’ 역할을 하면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트럼프 대선 캠프의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한 특검 후 미 법무부가 FARA 수사를 확대할 시기였다.

실제 미국 법무부는 이때 한국 정부에 ‘경고'를 보냈다. 18일 외교 소식통은 “미국 법무부가 2021년 한국 정부의 싱크탱크 지원을 총괄하는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KF)에 ‘한국 정부를 위해 활동하려면 외국대리인으로 등록하라'는 권고 서한을 보냈다'고 밝혔다. 테리가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에서 KF의 자금 지원을 받는 ‘KF 한국 국장'직을 맡았을 무렵이다.

당시 KF는 “우리는 독립 기관이며, FARA의 면제를 받는 문화·학술 교류를 하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미 법무부는 “KF 이사장이 ‘공공 외교’와 ‘역내 평화 증진’ 등을 얘기한 것을 알고 있다”며 FARA 적용 대상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KF를 외국대리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

KF가 ‘경고’를 받은 사실은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내 ‘서훈 라인’으로 분류되는 B 요원도 교체되지 않았다. B 요원은 2022년 6월 미 국무장관 주재 비공개 회의가 끝나자마자 참석자인 테리를 외교관 차량에 태운 뒤 메모를 촬영했다. 테리가 몸담은 싱크탱크에는 2022년 5월과 2023년 4월 두 차례 주미 한국 대사관 명의로 기금을 냈다. 외국 정부가 싱크탱크에 기금을 내고 행사 협조 등을 요청하는 것은 워싱턴 DC에서 흔한 ‘외교 활동’이다.

2023년 3월 테리 연구원은 윤석열 정부 외교부 측의 연락과 자료를 받은 뒤, 워싱턴포스트에 ‘한국이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용감한 조치를 취했다’는 칼럼을 썼다. 테리가 “칼럼이 마음에 들었다면 좋겠다”고 문자를 보내자, 외교부 당국자는 “(주미) 대사와 국가안보실장이 매우 행복해한다”고 했다. 2023년 4월 테리는 외교부의 의뢰로 한미 동맹 관련 행사를 주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당시 테리를 비롯한 워싱턴 주류 학자들의 의견은 원래 한·일 관계 개선에 긍정적이었고, 전문가 기고 의뢰도 통상적 일”이라고 했다.

한편 국무부에서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최고위 인사인 정 박 국무부 부차관보가 지난 5일 갑자기 사임한 것과 관련해서도, 이번 수사와 관련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다. 미 검찰 공소장에 테리가 “한국 업무를 담당하는 국무부 고위 당국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이력이 박 부차관보와 일치한다.

☞FARA(외국대리인등록법)

’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의 준말. 외국인을 포함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외국 정부·기관·기업 등의 정책 및 이익을 위해 일할 경우 미 법무부에 신고하고 활동도 보고하도록 하는 연방 법이다. 미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활동을 투명하게 파악하겠다는 취지로 1938년 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