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지난 2001년 3월 26일 오전 이임식을 마친 이정빈 전 외교통상부장관이 광화문청사 현관앞에서 배웅하는 간부직원들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연합뉴스

2001년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간 첫 정상회담 실패 여진이 계속되던 때였습니다. 3월 22일 오전 외교부 기자실에서 오전 보고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던 차에 평소 친분이 있던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기자, 어제(21일) TV 뉴스를 보니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 이정빈 외교부 장관 대신 반기문 차관이 참석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외교부 장관이 국내에 있는데 왜 차관이 참석했는지 궁금하네.”

전화를 끊고 나서 확인해 보니, 이 분의 말이 맞았습니다. 이 장관을 대신해 반 차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한 겁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무위원은 출장 중이거나 정상급의 외빈(外賓)을 만나는 등의 중요 행사를 제외하고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불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습니다. 이 장관은 21일 국무회의에 나가지 않을만한 행사가 없었습니다.

이정빈 외교부 장관(한 가운데) 이 2001년 2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한동 총리. 이 장관 옆은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 반기문 차관.

이에 대해 장관실에 확인하니 “이 장관이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회의에 가느라 국무회의에 참석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당시 20일부터 이틀간의 일정으로 서울 신라 호텔에서 ‘한·OSCE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유럽의 신뢰구축 경험을 동북아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정부와 OSCE가 공동주관하는 회의로, 미국·러시아·중국 등 60여 개국 100여명의 전문가가 참석했습니다. 저는 마침 이 회의에 참석한 얀 큐비스(Jan Cubis) OSCE사무총장을 만나 인터뷰를 한후 21일 자 신문에 이를 기사화해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의아한 생각에 OSCE 회의 한국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외교부 고위직을 마친 이후에도 주요 단체의 요직을 맡아 활동 중인 K씨가 “이 장관은 20일 개막식에서 오셔서 연설하고 가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습니다. 21일 장관이 온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정빈 외교부 장관의 국무회의 불참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1년 3월 23일자 5면 기사

취재해보니, 실제로 이 장관은 이날 오전 정부청사를 떠 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장관은 국무회의가 열리는 21일 아침 일찍 반기문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청와대에서 열리는 국무회의에 대신 참석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날 오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들과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던 반 차관은 의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국무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가 22일 저녁 조선일보 가판부터 실리자 외교부는 ‘오보’라며 다른 매체가 받아쓰지 못하도록 대응했습니다.

◇정국 악화로 무거운 분위기의 국무회의

DJ가 한미정상회담에서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지 못한 후 ‘외교부 장관 교체설’이 나오자 이 장관은 경질을 예감하고, 이날 오전 내내 집무실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정국의 악화로 1주일 전 국무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실제로 당시 대규모 개각설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의료보험 재정 파탄, 의약분업 후유증 등의 보건복지부 문제로 청와대가 코너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이 장관이 불참한 21일 국무회의도 김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습니다. 조선일보는 21일 열린 국무회의 풍경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21일 오후 최선정 보건복지부 장관을 전격 경질하리라는 흐름은 오전 청와대 국무회의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김 대통령은 특히 10시부터 1시간30분간 회의를 주재하면서 “국무회의를 개회합니다”와 “폐회합니다”란 두 마디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의료보험 재정파탄 문제에 대한 극도의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내각에 대한 일종의 불만표시였다.또 회의 말미에 최 장관의 보고를 들으면서 얼굴이 일그러지기까지 해,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 같은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최 장관이 “심려를 끼치고 주무 부처가 예측을 잘못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의약분업을 하면 돈이 더 들 수밖에 없다” “시행한 지 3~4개월밖에 되지 않아 평가는 아직 이르다”고 ‘자기변명’성 발언을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한 참석자는 “최 장관이 근본자세가 안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것이 전격 경질의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또 최 장관을 전격 교체한 데는 재정파탄 문제에 대한 국민불만이 점증하는 가운데, 주무 장관을 경질해 새 사령탑으로 하여금 후속대책을 마련토록 하는 ‘전략적 고려’도 한몫 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김 대통령은 이후 이 총리가 “대통령님의 마무리 말씀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별도 발언을 하지 않고 폐회 방망이를 두드린 뒤 곧바로 회의장을 떠났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들과 심지어 경호원들마저 깜짝 놀라 허둥댔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이정빈 외교부 장관이 불참한 2001년 3월 21일 국무회의의 무거운 풍경을 다음날 3면에 보도했다. (2001년 3월 22일자 3면)

◇ 이 장관, 폭탄발언에 차관보가 180도 다른 해명

최선정 복지부 장관 전격 경질에 이어 개각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정빈 장관이 3월 23일 ‘폭탄 발언’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장관은 당시 공개석상에서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 교섭과정에서 우리에게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추진에 찬성해 줄 것을 요구했다”며 “그러나 우리가 동의하지 않자 백악관은 추후 브리핑에서 ‘미국은 NMD와 관련,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지 않았으며, 한국도 지지입장을 밝힌 바 없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 장관은 “푸틴 대통령이 방한 당시 국회연설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그 문제는 당신들과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우리가 주장해 (그 대목을 연설문에서) 없앴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모두 미국, 러시아와 관련된 중요한 외교사안이었습니다.

이 장관의 발언은 즉각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사실이 일부 매체를 통해 인터넷에 먼저 보도된 후, 임성준 차관보가 급히 기자실을 찾아왔습니다. 임 차관보는 이 장관 말을 180도 뒤집는 해명을 했습니다.

임 차관보는 “미국이 한미정상회담교섭 과정에서 우리의 NMD체제 찬성을 요구한 바가 없다”고 수차례 언급 후, “NMD체제에 대한 미국 측의 요청을 지금 우리가 찬성할 입장이 아니고, 우리가 견지한 입장을 일관성 있게 지켜왔다고 (장관이) 말한다는 게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미국 측은 NMD체제 찬성요청을 하지 않았다. 백악관 브리핑에서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이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장관의 발언을 180도 뒤집는 해명이었습니다.

러시아와 관련해서는 “러시아가 국회 연설에서 대통령 연설에서 주한 미군에 관한 언급이 있을 것이라는 힌트가 있었다. 이 문제는 한미간의 동맹관계속에서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래서 러시아가 이해를 했다”고 했습니다. 임 차관보는 당시 “양국의 정상회담의 교섭과정이 대외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협조를 요청한다”고 했습니다. 푸틴, 대한민국 국회서 ‘주한미군 철수’ 연설하려 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14회> 참고.

그러나 외교부 장관이 공개석상에서 공개적으로 한 발언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외교부의 보도 자제 요청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당시 이 장관이 신문·TV 기자 등 20여명의 취재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민감한 사안을 공개한 데 대해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습니다.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이 2001년 3월 2일 정부 중앙청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문제 등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김대중 정부는 NMD 관련,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지 표명을 요청받은 바 없다고 밝혀왔으며, 미국도 요청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 알려짐으로써, 한미, 한러간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간 외교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장관은 파문이 커지자 직접 기자실을 찾아 NMD체제 문제에 대해 “미국이 정상회담 교섭과정에서 NMD체제에 대한 찬성을 지지한 적이 없는데, 한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우리나라에 지지를 요청한 사실과 헷갈려 잘못 표현했다”고 해명했습니다. 한미·한러 정상회담을 헷갈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주한미군 철수요구와 관련, “푸틴 대통령이 국회 연설과정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언급하겠다는 의사를 우리측에 전해왔으나, 이는 한미간의 문제이므로 삭제했다는 것을 보도차원이 아닌 뒷얘기 차원에서 한 것”이라고 말해 사실임을 뒷받침했습니다.

◇ 퇴임사에서 ‘자존외교’ 언급

이정빈 장관은 NMD 파문을 일으킨 지 3일만에 3·26 개각에서 경질됐습니다. (같은날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도 8개월만에 교체됐습니다.) 이 장관은 이날 이임식에 앞서 기자실을 찾았습니다. 자신의 거취를 둘러싼 언론 보도에 굉장히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 장관은 이날 기자들이 일제히 취재수첩을 꺼내 들고 취재를 하는 가운데 하고 싶은 말을 했습니다. 기자들은 이 장관이 자신의 발언을 언론이 보도해주기를 바란다고 해석 했습니다. 간담회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 우리 같은 중소국가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의 지지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지난 59년 외교관이 된 후 유감없는 외교관 생활을 했다. 일부에서 (장관)자질이 없다느니, 자리에 연연한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를 장관을 시킨 것은 실무적으로 도움이 돼서 시켰을 것이다. 41년간 외교관을 한 나를 두고, 장관 자질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내가 1급, 2급 비밀을 모를 사람이냐. 외무장관은 국익을 위해서 동쪽을 칠 때 서쪽도 쳐야 한다.

외교부를 위해서 그동안 한 일은 보람있었다. 나 만큼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없다. 반미감정이 나올 때 내가 먼저 앞장서서 저지했다. 한반도 주변관계는 한미관계 축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또 다른 축이 무너지면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국가의 자존이 중요하다. 자존이 있고 나서 한미관계가 있다.

서글픈 것은 지난번에 미국갔을 때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나라 신문은 미국신문이 쓰면 그대로 카피했다. 미국신문이 동으로 가면 동으로, 서로 가면 서로 간다. 우리나라의 대외관계를 하는데 왜 미국신문하고 똑 같아야 하느냐. 내가 자리 연연한다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벌써 한달전에 사의를 표명했었다. 할 일은 내가 해야겠다는 소신으로 했다. 자리연연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겠다.

보안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장관이 단세포적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느냐. 할 만한 이유가 있기때문에 발언한 것이다. 내가 떠나더라도 우리의 자존은 누군가 지켜야 한다.

우리 언론에서 외교를 도와야 한다. 그동안 1년동안 일도 많이 있었다.섭섭한 것은 일부 언론에서 ‘자질없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41년동안 외교관 해서 후회 없다. 중앙청에서 정부종합청사까지 몇 백m밖에 안되는 거리를 오는데 41년 걸렸다. 상황들이 바뀌는데, 외부변화를 못 느끼고 지냈다. 70년대 통하던 것이 안통하게 됐다. 이를 빨리 터득해서 살아야 한다. 70,80년대 구설수에 오르지 않은 것이 2000년대에는 구설수에 오른다. 열심히 외교하기 위해서 일했던 사람중의 하나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 장관의 이날 발언은 3일전 한미정상회담의 협상 기밀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것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이 장관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발언이 실언이 아니었음을 시사했습니다. 자존을 지키기 위해서 얘기했다는 것이지요.이 장관이 뜻하는 ‘자존’이 무엇인지를 두고, 기자들간에 설왕설래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000년 1월 13일 이 장관 임명부터 퇴임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2000년 1월14일 아침 일찍 첫 출근을 하는 이 장관을 인터뷰 하기 위해 압구정동 아파트를 찾았을 때 파자마를 입은 채 저를 맞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 장관은 그 때 “외교부의 인사제도가 개선돼야 외교가 발전할 수 있다. 재임기간동안 인사제도 개혁에 주력하겠다”고 취임 일성을 밝혔습니다. 이 장관의 말대로 이 장관의 재임기간중 인사제도 개혁안이 마련됐습니다. 그 골간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장관은 세련된, 어떤 의미에서 차가운 인상을 주는 외교관의 인상이 아니라 동네 할아버지의 구수한 인상입니다. 이 장관과 같은 공관에서 함께 근무했던 외교관들 중에는 그를 따르는 이도 많았습니다. 만나보면 소탈하고, 후배들 잘 챙겨주고, 의리가 있다는 것이죠. 인간적인 모습의 이 장관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모습으로 퇴임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안타까운 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P.S.

1. 이 장관은 경질된 지 약 2주 후인 4월 초 한나라당 당사를 찾아 이회창 총재를 만나 독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 차원이 아닌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정빈 장관이 김대중 정권과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을 모색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정치권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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