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대북(對北) 군사 정보 수집과 첩보 업무를 담당하는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의 첩보요원 신상 등 기밀 정보 다수가 북한으로 넘어간 정황에 대해 군 당국은 ‘보안 사고’보다는 ‘간첩 행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조사 중인 것으로 28일 알려졌다. 최근 국산 초음속 전투기 기밀 유출 사건, 수미 테리 기소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정보원의 아마추어 같은 행태 등이 이어지면서 우리 ‘정보 보안 시스템’의 위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김현국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망이 분리돼 있어 온라인을 통한 외부 해킹이 불가능한 정보사 내부 컴퓨터에서 보안 자료가 군무원 A씨의 개인 노트북 컴퓨터로 빠져나갔고, 이 노트북에 있던 자료들이 다시 외부로 유출된 정황이 발견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군무원 A씨가 상당 기간 관련 정보를 수집해온 정황이 있다”며 “현재로서는 간첩 행위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A씨는 노트북이 해킹당해 정보가 빠져나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보 당국 전·현직 관계자들은 “군 인트라넷에서 소수 인원만 확인 가능한 요원 신상 정보가 노트북에 저장됐다는 것부터가 정보 프로토콜상 있을 수 없는 행위”라고 했다. 단순 해킹 등 보안 사고일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방첩 당국은 A씨를 군사기밀보호법·군형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국군방첩사령부가 정보 유출 정황을 먼저 인지하고 정보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A씨가 특정됐고, 지난달 말 A씨를 입건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요원 신상 등 민감 정보 유출 사실을 사전에 인지조차 하지 못했거나, 인지하고도 이를 쉬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군 당국은 28일 A씨가 ‘직무 배제 상태’라고 밝혔다. A씨는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이번에 유출된 정보사 요원의 신상 정보는 수백에서 수천 건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이 중에는 해외에서 위장 신분으로 정보 수집 활동을 하고 있는 블랙 요원 명단도 포함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보 유출 사건으로 인해 정보사 일부 요원은 해외 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중국·러시아에서 활동을 했던 정보사 인원 일부는 신분 세탁을 위해 개명(改名)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사는 과거 해외 현장에서 뛴 경험이 없는 요원 위주로 해외에 파견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수사 초점은 정보사 내부망에 있는 요원 신원 정보를 A씨가 어떻게 접근해 개인 노트북에 옮겼는지에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정보사 요원 신상 자료는 정보사 외에는 고위 군 당국자도 접근이 어렵다. A씨는 현역 시절 정보사 현장 요원으로 활동했지만 인사 파트 등에서 일한 적이 없어 명단 입수 과정에서 조력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당사자인 A씨가 “노트북이 해킹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안 사고의 경우 형량이 낮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 정보 당국 관계자는 “노트북에 민감 정보를 저장해두고 해킹해서 가져가도록 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일단 신분이 노출된 요원은 재파견이 사실상 불가능해 정보망 손실이 작지 않을 전망이다. 해외 공작 파트 간부 출신 인사는 “중국 등 민감 지역에서는 요원 두세 명만 신상이 특정돼도 곤란하다”고 했다. 우리 측 요원 정보가 알려질 경우 타국 내 정보원 등 협조자 신상도 줄줄이 노출될 수 있다. 수년간 정보 당국이 공을 들여 만든 정보망이 와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사는 일단 급한 대로 몇몇 주요 거점에서 활동할 대체 인력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들어 정보 당국 첩보와 방첩은 전방위적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국산 전투기 KF-21 기밀 유출 사건 때 방첩 당국은 인도네시아 외국인 노동자가 USB를 통해 차곡차곡 개발 정보를 빼돌린 것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보안검색대에서 적발하기 전까지 사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6월에는 국산 헬기 수리온 및 전투기 KF-21 관련 기밀 정보를 판매한다는 텔레그램 계정이 나타나 국정원과 방첩사가 공동 조사에 나선 상태다. 외부에 공개된 적 없는 기밀 정보가 해당 텔레그램 계정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수미 테리 기소 건과 관련해서 국정원은 아마추어적 행태를 보이며 상대국 정보기관에 신분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2018년에는 정보사 공작팀장이 해외 정보 요원 명단 등 주요 기밀 109건을 누설했고, 이 중 56건이 해외 정보원에게 팔아넘겨진 사건도 있었다. 전직 정보기관 고위 인사는 “정보의 위기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참담하다”며 “정보사, 국정원뿐만 아니라 관련된 전 조직에 대한 고강도 점검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