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가 뉴라이트를 사실상 ‘친일파’로 규정하고, 뉴라이트를 판별하는 9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뉴라이트 인사인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며 정부 광복절 경축식 불참을 선언한 광복회가 자의적인 뉴라이트 판별법으로 사상 검증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온다.
광복회는 12일 오후 홈페이지에 올린 ‘9대 뉴라이트의 정의(定義)’에서 뉴라이트를 “일본 정부의 주장대로 ‘식민 지배 합법화’를 꾀하는 일련의 지식인이나 단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하는 자나 단체 ▲1948년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자나 단체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자나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고 ‘임의 단체’로 깎아내리는 자나 단체 등이 뉴라이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일본 식민 지배를 합법화’한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뉴라이트=친일파’라는 광복회의 정의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데다, 뉴라이트 판별 기준도 자의적이어서 사상·학문의 자유를 억누른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광복회가 자신들은 100% 확실하게 선악을 구별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하며 사상 검증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독립기념관장 인선을 둘러싼 정부와 광복회의 갈등이 사상 검증 논란으로까지 번졌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낙마를 위해 초유의 ‘정부 광복절 경축식 불참’ 카드를 꺼낸 광복회가 ‘9가지 뉴라이트 판별법’을 제시하며 이 중 하나라도 해당하면 “일본의 식민 지배 합법화를 꾀하는 일련의 지식인이나 단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광복회의 뉴라이트에 대한 정의가 사실과 다른 데다, 판별 기준도 역사적 평가에 부합하지 않거나 자의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자기들만의 기준으로 뉴라이트를 ‘토착 왜구’로 몰고 있다”고 했다.
광복회가 제시한 9가지 뉴라이트 판별법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한다 ▲1948년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고 ‘임의 단체’로 깎아내린다 ▲식민사관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은연중 주장한다 ▲일제강점기 곡물 수탈을 ‘수출’이라고 미화한다 위안부나 징용을 ‘자발적이었다’고 강변한다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할 근거가 약하다고 주장한다 ▲뉴라이트에 협조, 동조, 협력하는 자나 단체 등이다. 광복회가 뉴라이트를 사실상 친일파와 동의어로 보는 만큼, 이런 주장을 하면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일부 기준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거나 역사적 평가와 부합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건립 후 1·2·3대 대통령을 지냈다. 광복회처럼 ‘1919년’ 건국’을 지지하든, 아니면 ‘1948년 건국’을 지지하든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은 이승만 외에 다른 사람일 수 없다. 그런데도 광복회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부르면 친일파라는 것이다.
게다가 광복회가 ‘뉴라이트에 협조, 동조, 협력해도 뉴라이트’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을 위해 기부한 사람도, 이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조명한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박수를 친 사람도 넓은 의미의 뉴라이트에 포함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은 “영화를 본 177만명은 모두 친일파라는 모욕적인 말”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면 뉴라이트”라는 광복회의 기준에 대해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는 “광복군으로 국내 진공을 준비했던 장준하·김준엽은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의 파벌 싸움을 비판했었다”며 “그렇다면 임시정부를 폄훼했으니 독립운동가인 이들마저도 뉴라이트라는 것인가”라고 했다. 북한이 1972년 출간한 역사서 ‘조선전사’에는 “임시정부는 인민이 피 흘리고 싸울 때 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독립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하고 아양을 떨면서 원조를 구걸했다”고 한 구절이 있다. 임시정부를 ‘반인민적 정부’라고 본 북한도 광복회 기준으로는 뉴라이트가 된다.
학계에서는 특히 광복회가 문제 삼고 있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뉴라이트로 볼 근거도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김 관장 본인도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며 “광복회의 9가지 기준 중에서는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을 일본이라고 강변하는 자’만 해당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입장을 소상히 밝힌 바 있다”고 이날 본지 통화에서 말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경기에 출전해야 했고, 일본 여권을 들고 다녔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김 관장 임명 이후 불거진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13일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건국절 논란이 국민 민생과는 동떨어진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라는 취지로 지적하며 이같이 말했다고 대통령실 관계자가 전했다
하지만 광복회는 이날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 전쟁기념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촉구했다. 김대하 광복회 서울시지부장은 이날 집회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됐다고 억지 주장하는 인사가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된 것은 독립기념관의 역사와 정통성에 반하는 것”이라며 “현대판 밀정”이라고 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날 강정애 보훈 장관을 만나 ‘김 관장의 사퇴가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