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오는 27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 뛰어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이 2020년 자신의 독서 목록 중 하나로 꼽아 화제가 된 책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재일교포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2020년 5월 출간한 ‘조선반도(한반도)와 일본의 미래’였습니다.
이시바는 이 책이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한일관계는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단순한 정치적 접근이 아니라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책을 근거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일본의 안전 보장에 필요하다는 지론을 펼칩니다.
◇ 이시바, 아베의 경제 제재 비판하며 한국 공부
이시바는 2019년 9월 한일관계가 악화될 때 아베 신조 정권의 대한(對韓) 경제 제재에 대해 “당분간 이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는데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결코 기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것(경제 제재)이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상황이 엄중하고 복잡하며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 “일본과 한반도는 항상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긴 역사로 볼 때, 정말로 회복 불가능하다고 노력을 포기해도 되는 걸까”라고 했습니다. 이시바는 당시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후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역사를) 알고 상대하는 것과 모르고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했는데, 강 교수 책을 추천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강 교수는 재일교포 2세 정치학자로 한국 국적자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됐습니다. ‘고민하는 힘’, ‘애국의 작법’ ' 세계화의 원근법’ ‘내셔널리즘’ 등을 잇달아 펴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와세다대 재학 중인 1972년 첫 방한 후 나가노 테츠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본명인 ‘강상중’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뉘른베르크대에 유학하면서 독일식 합리주의에 기반한 학문 세계를 구축한 후, ‘강류(姜流)’로 불리는 자신의 생각을 지식인 사회를 향해 발신해 왔습니다.
강 교수는 201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할 정도로 DJ와 민주당에 애정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그는 당시에도 한일관계를 염려하며 일제 불매를 포함한 ‘노 재팬’ 운동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한미일 관계를 걱정하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으면 한미관계가 악화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 “문 대통령, 일한 갈등에 정치적 자원 낭비”
저는 2019년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조선일보와 제휴한 마이니치 신문의 사와다 가쯔미 논설위원의 권유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강 교수는 자신의 ‘승부작’이라고 밝힌 이 책에서 일본의 미래와 한반도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론을 밝혔습니다. 제가 당시 주목한 것은 한국의 민주당을 지지했던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일(對日)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보였기 때문입니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문 대통령 비판에 할애했습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 “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을 읽어보면 일본에 특정한 평가를 동반하는 언급은 거의 없다”며 “문 대통령에게 있어서 일본에 관한 평가는 사실상 ‘백지상태’ “라고 했습니다.
강 교수는 2019년 6월 남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판문점에 만난 것을 정점으로 북한문제는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미북 교섭이 막혀 있고, 북한은 한국과의 교섭에 대해 완고하게 거절하고 있다”며 “일한 갈등이 심각해지는 중에 문 정권의 북한 정책도 막혀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과 그 정권에 결여돼 있는 것은 남북접근과 화해 진전을 도모할 때 일한 간의 의사소통을 깊게 하는 것, 양자(남북관계와 한일관계)를 평행하게 진행해 가는 복안(複眼)적인 외교전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신뢰관계를 지금보다 더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 “한일기본조약은 더 이상 분규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
강 교수는 특히 당시의 한일관계를 ‘복합골절’ 상황이라고 규정하며 문 대통령을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해가며 비판했습니다. 그는 “돌이켜 보면 남북화해를 진전시키기 위해 한국의 모든 과거 정권은 특히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다대한 외교적 리소스와 에너지를 할애해왔다”며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가 주변 나라, 특히 일본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지침을 명확히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 정권에 비해서 일본과 강한 관계 구축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불신감과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일한 갈등에 정치적 자원을 낭비할 수 밖에 없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강 교수는 ‘일한기본조약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이유’ 챕터에서는 “이런 저런 타협과 모순을 갖고 있는 조약이지만, 이미 체결돼 반세기 동안 경과된 일한기본조약은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적어도 그것은 일한관계가 더 이상 분규(粉糾) 하지 않게 하는 안전정치”라고 했습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징용 배상 추진 등으로 1965년에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습니다. 그는 “만약 어느 쪽이 (기본합의를) 부정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한일관계의 바닥이 뜯겨져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강 교수는 그 밖에도 이 책에서 북일관계, 북핵 문제, 문재인 정부의 남북화해 움직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 한일관계 개선되자 심포지엄 나온 강 교수
저는 강 교수에게 이 책의 저술과 관련한 내용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의 사무실은 “(강 교수가) 코로나 사태이후 출장 등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취재 요청에 대해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해해 달라”고 회신해왔습니다.
한국의 문재인 정권에 실망한 강 교수는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 상황,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자제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윤석열 정권 발족 후, 한일관계가 개선되자 모처럼 2023년 6월 도쿄에서 열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5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가 한일 관계와 관련된 행사에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반가웠습니다.
강 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외교의 실패로 인해 일어났다”며 “이러한 세계적 위기 속에서 한일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재일교포로서 한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는 50년 전에 꿈도 꾸지 못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가 지배한 나라와 같은 수준에 올랐다는 점에서 한일관계는 매우 독특하다”며 양국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내년(2024년) 미국 대선에서 만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한다면 한일이 하나가 돼서 미국이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에 빠지지 않도록 안보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양국간 강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중요한 얘기였습니다. DJ-오부치의 한일 화해 노선을 지지해 온 그가 양국을 오가며 다시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이재명 대표와 그가 이끄는 민주당이 시대착오적인 ‘반일’ 을 그만 거둬들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