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헤케넨 핀란드 국방부 장관이 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별채에서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진명 기자

핀란드 정부는 지난 2일 대부분의 러시아 국적자가 핀란드에서 부동산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이 핀란드 의회를 통과해 발효되면 핀란드나 다른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국적 혹은 영주권을 지녀 ‘면제’ 대상이 된 소수의 러시아인을 제외하고 대다수 러시아인은 핀란드에서 부동산을 매입할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이런 법안을 제안하며 안티 헤케넨 핀란드 국방부 장관은 “핀란드에 대한 적대적 영향력을 잠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헤케넨 장관은 러시아인이 소유한 핀란드 내의 부동산 3500건을 별도로 모니터링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핀란드는 2020년 1월 1일부터 유럽연합(EU)/유럽경제지역(EEA) 국가 이외의 외국인이 부동산을 취득하려면, 사전에 국방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다. 핀란드 국방부는 이 제도에 따라 지난해 10월 외국인이 신청한 3건의 부동산 거래를 불허했고, 올해 1월에도 3건을 추가로 불허했다.

왜 핀란드는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에 민감한 것일까? 지난 9일 한국을 방문한 헤케넨 장관을 직접 만나 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인공지능의 책임 있는 군사적 이용에 관한 고위급회의(REAIM)’ 참석차 한국에 온 그는 이날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 후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러시아인의 부동산 매입을 금지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헤케넨 장관은 “우리는 러시아와 수백 년 동안 이웃이었다. 러시아가 소련 시절, 또 푸틴 집권 후 무엇을 해왔는지 안다”고 말을 시작했다.

“그들은 압박을 가하기 위해 에너지 의존성, 부동산, 사보타주(적의 산업시설에 대한 파괴공작)와 사이버 영향력까지 ‘하이브리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모든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유사시 또는 평시에 사용하기 위해 이런 도구들을 축적하지요.”

헤케넨 장관은 “부동산도 그 일부”라며 “우리는 세계 전역에서, 예컨대 우크라이나에서 부동산이 불법 정찰이나 사보타주 같은 영향력 행사를 위해 쓰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핀란드 당국이 러시아인의 소유한 부동산을 추적해서 “러시아가 부동산을 획득한 일부 거래에서 푸틴의 정당과 관련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일부 거래는 러시아 안보당국으로 연결됐습니다. 러시아는 군사 시설이나 국경 통제소, 해저 케이블 같은 주요 인프라 부근의 부동산을 사들이려 했어요.”

헤케넨 장관은 “그냥 보기에는 창고라든가 문제가 없어보이는 거래라도 유사시 안보 상황이 바뀌면 그 설비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그래서 유럽연합( EU)이나 나토 회원국 국민을 제외한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을 제한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부동산 취득은 세계 곳곳에서 ‘안보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미·중 간의 정찰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미국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미군 기지 인근의 농토를 계속 사들여 문제가 됐다.

지난해 2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머틀비치 앞바다에서 미 해군이 중국의 고고도 정찰 풍선 잔해를 수거하고 있다. /AFP, 미 해군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5월 와이오밍주에 있는 프랜시스 E. 워런 공군 기지 1.6km 반경 내의 토지를 사들여 데이터센터를 만든 중국 기업 ‘마인원 파트너스'에 강제 매각 명령을 내렸다. 이 공군 기지는 미군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 배치된 전략 미사일 기지다.

백악관은 “전략 미사일 기지 부근에 외국인이 부동산을 소유하고, 감시·첩보 활동 가능성이 있는 외국 장비를 두는 것은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마인원 파트너스는 중국 정부가 일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해당 부지에서 다른 기업들과 공동으로 가상화폐 채굴을 위한 데이터센터를 운영 중이라고 했는데, 백악관은 이 회사가 설치한 특정 장비가 정찰·감시에 사용될 수 있다고 봤다. 강제 매각 명령과 함께 백악관은 이 장비에 대한 철거 명령도 내렸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미군 기지나 다른 안보 시설 인근 100마일(160km) 이내에 토지를 매입하려는 외국인은 먼저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발표했다. 중국의 푸펑 그룹이 노스다코다주의 공군기지 인근에 370에이커의 토지를 매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2020년 중국 에너지 기업이 텍사스 남부의 최대 파일럿 훈련 기지 근처 토지를 매입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하지만 마인원 파트너스는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와이오밍의 공군기지 지근거리에 데이터센터를 만들었다.

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플로리다부터 하와이까지 미군 기지 인근에 중국 기업이 사들인 부동산은 최소 19건이 넘는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9월 “최근 몇 해 사이에 중국인이 미국 내 군사 기지에 불법 진입한 사례가 100건이 넘었다”며 “뉴멕시코주의 미사일 기지를 염탐하거나 플로리다의 로켓 발사 기지 근처에 스쿠버 다이버를 투입한 경우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미군 기지 인근 부지를 중국 기업이 계속 매입하면서,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미 재무부는 지난 6월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가 외국인의 부동산 매입도 투자하는 방향으로 권한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이 미국 내 민감한 지역에 부동산을 계속 사들이는 것이 발견되자, 미 의회도 이를 사전에 스크리닝할 수 있는 제도를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