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미 정부의 외교 마찰을 부른 코리아게이트의 박동선(89)씨가 19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별세했다. 박씨는 미 의회 주요 인사들에게 수십만 달러를 제공하는 등 불법 금품 로비를 했다는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미 의회 증언대에 섰다. 코리아게이트는 1976년 워싱턴포스트지가 “한국인들이 한국 정부 지시에 따라 50만~100만달러를 미국 의원 등에게 제공해 매수 공작을 벌였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2년간 한미 관계를 긴장으로 몰고 갔다. 당시 한국의 미 의회에 대한 불법 로비 스캔들로 번지면서 지미 카터 미 행정부와 박정희 정부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19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은 코리아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고인은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17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워싱턴 DC의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뒤 사업을 하며 쌓은 미 정계 인사들과의 친분을 앞세워 중앙정보부 등 한국 정부 측 로비스트로 나섰다.
박씨의 미 의회 인사 등에 대한 금품 로비가 벌어진 1970년대 중반엔 인권 문제 등 박정희 정권에 대해 미 정계의 부정적 인식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이에 ‘군사 원조 축소’ ‘주한 미군 철수’ 가능성 등에 압박을 받은 박정희 정부는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완화를 위해 거액의 불법 로비 자금을 박씨 등을 통해 미 의회 인사 등에게 제공했고 관련 의혹이 미 정가에서 돌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워싱턴포스트가 1976년 10월 박씨와 한국 중앙정보부 등이 미 상·하원 및 유관 공직자들에게 매년 50만달러에서 100만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불법 로비를 통해 친한(親韓)적 관점을 전파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코리아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100명이 넘는 미 상·하원 의원들이 코리아게이트에 연루됐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미 당국의 수사와 미 의회 조사가 시작됐다.
결국 미 의회 등은 로비스트로 지목된 박씨 송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외교적 압박도 가하면서 한미 관계가 악화했다. 양국 정부 협상 끝에 박씨는 사면(赦免)을 조건으로 송환에 응했다. 박씨는 1978년 2월 미 상·하원 윤리위원회에 출석해 공개 증언했고 “32명의 전·현직 미 의원에게 85만달러를 선거 자금으로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1978년 8월 16일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이 박씨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면서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이 사건으로 미 현직 의원은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고 하원 의원 여러 명이 견책 등 징계를 받았다. 요란했던 이 사건으로 실형을 산 사람은 전직 의원 1명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부는 국내적인 민주화 요구는 물론 미국 정부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