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통일하지 말자.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는 주장을 하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부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5월 “통일은 비관적이다. 통일은 후대로 넘기자”고 주장한 것도 재조명되면서 진보 진영 일각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국가론’을 수용, 새로운 담론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임 전 실장은 19일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내려놓자”며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한 헌법 3조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 등을 제안해 논란을 일으켰다. 정세현 전 장관은 20일 같은 회의에서 “박정희 정권부터 통일부에서 일했는데 남북 관계 변천사를 회고해 볼 때 지금 시점에서 통일은 불가능하게 됐다”며 “임 전 실장의 얘기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남북이 1991년 유엔에 가입했으니 사실은 그때부터 두 개의 국가”라며 “임 전 실장 얘기가 시기적으로 빠른 감은 있지만 결국 남북 관계는 그 길(2 국가)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로 “우리 국민의 통일 의지가 약화된 정도가 아니라 사라졌다. 젊은 사람들은 통일에 관심 없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부원장 출신의 이연희 의원도 20일 TV조선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에서 남북 관계가 너무 후퇴했고 지정학적 정세가 많이 바뀌었다”며 임 전 실장의 ‘2국가’ 발언을 지지했다.
이에 앞서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난 5월 한 회의에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잠정적인 특수 관계라고 했지만, (남북한에서) 두 개의 국가를 향한 원심화 경향을 막기 어렵다”며 “현재의 상황은 두 개의 정상적인 국가로 있을 때만 못하다”고 했다. 그는 “지난 남북 관계는 복싱 선수가 클린치 상태에서 뒤통수 쳐서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기에 이제는 정상적인 두 개의 국가가 됐다가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통일은 후대로 넘기자”며 ‘2국가론’을 지지했다. 그는 “나는 (단기간 내) 통일에 대해서 비관적”이라며 “내가 살아 있는 한 통일이 안 된다고 단정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고 선언했다. 이후 김일성·김정일 때부터 이어온 ‘조국 통일 원칙’을 전면 폐기하며 호전성을 증대시키는 상황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 대북 정책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이들이 김정은의 2국가론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올해 들어 친북 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가 통일을 삭제한 한국자주화운동연합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역대 진보 정부의 대북 실세들이 2국가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에 대해 김천식 전 통일부 차관은 “역대 진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김정은이 제기한 2국가 체제를 받아들이자고 하는 것은 반(反)헌법 행위이자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헌법 제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와 제4조(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에 규정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남주홍 자유총연맹 고문은 “김정은이 하루아침에 통일을 삭제해 버리자 역대 진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평화를 명분으로 북한의 현상 유지 정책을 지지하는 매국 행위를 하고 있다”며 “시종일관 견지해 온 ‘우리 민족 끼리’ 정신에 따른 동조 현상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은의 2국가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진보 진영이 분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정동영 의원(노무현 정부 통일부 장관)은 20일 “임종석 전 실장이 어제 기념사에서 사고를 친 것 같다”며 “(임 전 실장의 발언은) 헌법 3조, 4조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정 의원은 “결정적인 것은 (2개의 국가가 되면) 북한 권력 내부에 이상 징후가 발생했을 때 중·러의 간섭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남북은 두 개의 국가이기 전에 통일을 지향하는 관계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로 평화 통일을 추진해 왔는데 이것을 변경할 어떤 사유도 없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의원은 임 전 실장의 주장에 대해 “학자는 주장할 수 있지만 현역 정치인의 발언으로는 성급하다”고 했다.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지난 5월 한 회의에서 김정은의 2국가론에 대해 “북한이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우리가 동조해 입장을 바꾸는 건 마땅치 않다.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 목표에 충실해야 한다”며 수용 반대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