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최근 제가 주목했던 뉴스는 워싱턴 DC의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이 지난 11일 미국의 국가사적지(NRHP·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등재됐다는 소식입니다. 영어로 Old Korean Legation(옛 대한제국공사관)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돼 앞으로는 미국의 법령에 의해서 보호받게 됩니다. 미국내 한국 정부 건물이 미 연방정부의 국가사적지가 된 것은 처음인데, 최근 우호적 분위기의 한미관계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한미외교의 현장으로 미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장소라는 점이 건물의 핵심가치로 인정됐다고 합니다. 아울러 건물의 내외부 모두 원형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복원 및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역사적 공간으로 잘 재현된 것이 등재된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2010년 공사관 매도 100주년 계기로 되찾기 운동 본격화
제가 공사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2010년 이었습니다. 미국의 한인 사회에 공사관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돼왔는데, 한일합병 100주년을 맞아 공사관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단돈 5달러에 강제 매각됐던 공사관 건물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본격화한 겁니다.
워싱턴에서 알게 된 윤기원 역사보존협회 회장과 로널드 콜먼 전 미 연방 하원의원(변호사)이 2010년 6월 버지니아주에서 ‘주미공사관 건물 매도 100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할 때 취재했습니다. 이들은 공사관을 되찾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의 여론도 중요하다고 보고, 연방의회를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대한제국 의친왕의 딸 이해경씨도 기자회견에 참석, 공사관 되찾기의 필요성을 호소했습니다. 서명운동을 시작하자마자 쳇 에드워즈, 실베스트레 레이어스, 진 그린 등 하원의원 7명이 공감해 서명했습니다.
윤 회장은 “공사관 건물은 미국 행정부 관리였던 세스 L. 펠프스가 1877년 건축하고, 국무부 차관급이던 그의 사위가 대한제국에 매입을 알선한 것”이라며 “미국으로서도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고 했습니다. “양국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건물을 속히 사들여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윤 회장은 미국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다가 워싱턴에 대한제국 공사관이 있음을 알고 역사보존협회를 만들어 되찾기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콜먼 전 의원은 1983년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14년간 7선(選)을 기록한 중진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인 부인 조경숙씨의 권유로 이 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콜먼 전 의원은 “미국 수도 워싱턴에 남은, 100년 넘은 한국의 첫 재외 공관을 보존하는 것은 한미동맹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중요성을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백악관 북쪽 로간 서클에 있는 주미공사관은 1882년 한미 수교 후인 1891년 고종이 사들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에 방 9개가 있으며 대한제국 유품도 일부 간직돼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조선 주차(駐箚·주재) 미국 화성돈(華盛頓·워싱턴) 공사관’으로 명명된 이 건물에는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가 1층을 집무실로 사용하고, 직원과 가족은 2, 3층을 썼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 상태로는 거액인 2만5000달러를 들여 매입했으나, 일제는 이를 겨우 5달러에 강제로 사들인 다음 10달러에 미국인에게 팔아버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건물주, 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다가 본지에 공개
공사관 되찾기 서명운동을 기사화하면서 공사관 내부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졌습니다. 공사관 내부를 취재해 알리면 되찾기 운동이 더 확산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건물주 연락처를 확보 후, 여러 차례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주는 일절 취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매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마지막 방법을 썼습니다. 제 연락처와 함께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건물주의 우편함에 남겨 놓았습니다. 조선일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고, 발행부수가 가장 많으며 한미관계를 중시하는 신문이라는 점도 명기해 놓았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약 1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건물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건물 내부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2010년 8월 11일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옛 공사관으로 향했습니다. 건물주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1층부터 100년 전 모습을 보존한 외교공간이 나타났습니다. 1891년 대한제국이 매입했던 ‘대조선 미국 화성돈 공사관’은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도 당시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 이 건물이 강제로 매각되기 전에 1층을 찍은 사진 2장과 지금의 건물 내부를 비교한 결과 벽난로와 거울, 칸막이와 창문 등의 주요 구조물이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식당의 대형 거울은 매각되기 전에 찍은 사진 속의 거울과 크기도 비슷했으며 그 위에 대한제국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있는 꽃 문양도 있었습니다. 이 건물의 2층에는 4개의 침실과 2개의 화장실이 있었으며, 3층은 중간에 얇은 기둥만 있을 뿐 대형 거실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이 공사관으로 구입한 후 10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건물 주인이 자주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 “앞으로 더 이상 건물 내부를 공개하지 않겠다”
건물주인 티모시 젱킨스씨는 1964년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흑인 법률가로 워싱턴 DC에 위치한 공립대학교 District of Columbia 대(UDC) 총장을 역임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이 건물의 역사성을 중시, 매입하려는 의사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77년 이 건물을 구입 후 33년 동안 거주해 온 젱킨스씨는 “이 건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가급적 원형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고 강조했습니다. 1970년대 말 워싱턴 DC 에서 이 건물을 지었던 남북전쟁 당시의 영웅 펠프스를 기리기 위해 매입 후 기념건물로 활용하려고 했다는 일화도 들려줬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들에게 이 건물이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 가족이 33년동안 살아온 이 건물을 6개의 조건만 맞으면 양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건 6개의 조건은 구체적이었습니다. “나와 가족들이 영구히 살 수 있는 ‘편안한 건물’로 이전하고, 이에 수반되는 비용을 모두 지불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젱킨스씨는 “경제적으로 발전한 한국이 비용의 문제로 이 문제를 10년 넘게 끌고 자꾸만 이것 저것 물어보며 귀찮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정부에서 이 건물의 매입을 위해 자신과 접촉한 부동산 업자만 6~7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젱킨스씨로부터 취재한 이런 내용은 기사화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미대사관 관계자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매입 협상에 참고하도록 했습니다.
공사관 내부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본지 보도로 알려지고, 미국내에서 서명 운동이 진행되면서 매입 협상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우리 정부는 원래 공사관 매입 비용으로 책정했던 30억원보다 훨신 더 많은 금액을 주고 이를 사들였습니다. 이에 대해 건물주인 젱킨스씨가 너무 무리하게 요구했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저는 그런 측면도 있으나 그가 30년 넘게 건물을 그대로 관리하고 내부 시설을 보존한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전략적으로 움직였다면 우리 정부가 훨씬 더 신속하고, 유리하게 매입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매입 이후 국가유산청은 5년간의 자료조사와 복원 공사를 통해 현재 일반인 관람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서울로 복귀 후 워싱턴 DC에 몇 차례 출장을 갔지만 아직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워싱턴 DC를 방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공사관을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