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2004년 10월 초, 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됐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알고 지내던 국회 외교통상위 소속 A 의원의 보좌관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외교부에서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한 국감 자료집 중 한 권을 교체해야 한다며 이를 회수하고 새 자료집을 줬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느냐”는 겁니다.

다른 정부 부처도 그렇지만, 외교부는 특히 다른 나라와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기에 외부로 나가는 자료를 만들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이미 배포된 국감 자료집을 바꾸려고 외교관들이 일일이 외통위 의원들을 찾아다닌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습니다.

비밀리에 취재를 해보니, 외교부가 국회의원들에게 회수하고 새로 배포한 자료는 ‘국감 자료집 7권’이었습니다. 우선 약 300페이지에 가까운 신구(新舊) 자료집을 확보했습니다. 두 권을 나란히 놓고 한 장씩 넘겨가며 비교 했습니다. 그 결과 186쪽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원래 배포된 ‘국감자료집 7권’ 186쪽엔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인 만큼 이 연장선상에서 간도(間島)협약은 무효”라고 했는데, 새로 배포된 자료집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4년 8월 23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만나고 있다. 우다웨이 부부장은 당시 우리 정부에 간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DB

◇고구려사 문제에 이어 간도 문제 제기돼

2004년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이어 간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우리 국민의 관심이 높았던 때 입니다. 9월 3일 59명의 한국 국회의원이 간도를 중국에 넘겨준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을 제출하자 주한 중국대사관이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습니다.

간도는 통상 남부 만주 지역 중 두만강 북쪽 땅(동간도)을 뜻하지만, 압록강 북쪽도 서간도로 불려왔습니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조선과 청 나라가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만들 때 합의한 것처럼 조선 영토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는 한국인이 급증, 간도협약 당시 동간도에만 10만 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 조선인 보호용으로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습니다. 1902년엔 간도관리사 종3품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9년 간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했습니다. 그 대가로 만주 철도·광산 등 이권을 보장받은 게 간도협약입니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조약이므로 이에 근거한 간도협약도 국제법상 무효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간도협약이 무효가 되면, 이론적으로는 간도협약 이전에 존재했던 한·중 국경선이 양국의 국경선이 됩니다. 국제법상 영토문제의 대체적인 시효 만료가 100년이므로 2009년 이전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시 분출했습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목적이 간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동북공정의 33개 연구과제 중에서 12개는 한·중 변경(邊境)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 고구려사 문제로 방한한 우다웨이, 간도 영유권 문제 거론

이렇듯 간도 협약은 중국에서 볼 때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중국은 2004년 8월 고구려사 왜곡 문제 논의를 위해 방한했던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우리 정부가 간도의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사실은 조선일보가 2004년 9월 11일자 1 면에 비중있게 보도했습니다.

우다웨이는 최영진 외교부차관 등에게 “한국이 동북지방 영토 국경 문제에서 중국 정부와 국민을 우려시키는 시도가 있다”며 간도문제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우다웨이는 “간도 영유권은 중국의 중요한 관심사”라며 “한국이 이 문제를 절대 거론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중국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조선일보 문화부 유석재 기자가 간도 관련, 의미있는 단독 보도를 했습니다. 유 기자는 2004년 9월 9일 [두만강 이북 ‘간도는 조선땅’ 1909년 일제 제작 지도서 ‘증거’ 발견]이라는 제목의 1면 톱 기사를 썼습니다.

조선일보 2004년 9월9일자 1면 톱기사는 일본이 간도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이 간도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는 겁니다.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힌 이 지도는 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 일본측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 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일 뿐 아니라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였습니다.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이 서지학자 고 이종학씨의 소장자료 중에서 찾아내 공개한 이 지도는 ‘메이지(明治) 42년(1909년) 10월, 축척 40만분 1′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습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는다’고 적었으나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두만강’설을 내세워 간도지역이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 간도협약은 무효

이렇듯 간도와 관련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외교부가 국감 자료집에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다가 이를 정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안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2004년 10월 13일 조선일보 1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1면 톱 기사로 게재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1909년 중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의 국감 자료집을 배포했다가 회수한 것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4년 10월 13일자 1면 톱 사.

우리 정부가 1909년 중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間島)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정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외교통상부는 이 같은 정부 입장을 밝힌 ‘국정감사자료집’을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했다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수거한 것으로 12일 밝혀졌다. 이 문제에 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도협약은 사실상 조선의 영토였던 간도를 일본이 중국에 넘겨준 대가로 만주 철도설치권 등 특권을 얻은 조약이다. 간도협약이 무효라면 백두산과 두만강 북쪽 지역이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본지가 입수한 외교부의 ‘국정감사자료 7권’은 186쪽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의 간도협약내용’마지막에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우리 정부는 1905년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이 강박에 의해 체결된 무효조약인 만큼, 이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체결한 1909년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견지함”〈사진〉으로 돼있다.

외교부는 지난 5일 국정감사에서 이 자료집을 배포했다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자료집을 수거키로 결정, ‘간도협약은 무효’ 부분을 삭제한 새 자료집과 교환했다. 새 국감 자료집에는 “간도문제는 북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는 아주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서, (중략) 신중히 다뤄나가야 할 문제”라는 입장만 남겨뒀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지만,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간도협약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이를 대외에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외교부,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며 당일 아무런 대응 안해

외교부가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국감 자료집에 밝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외교부는 반기문 장관 주재 실국장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조약국과 아시아·태평양국 관계자들이 수차례 대책을 논의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 국민들에게 알려져 좋은 측면이 있으나 중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 기회에 앞으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고, 그에 반대되는 입장도 피력돼 논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외교부 이규형 대변인은 이날 오전 이 문제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로 했으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브리핑이 수차례 연기된 끝에 정부는 당일 아무런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겁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외교부 국정감사 자료집의 ‘간도협약 무효’ 비사는 다음주에 하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