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 북한군 파병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신(新)냉전으로 끌고 가는 러시아, 윤석열 정부와 우호적 관계가 예상됐던 일본 이시바(자민당) 총리의 중의원 선거 과반 실패 등 한국을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미국이 가장 경계하던 유럽·중동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한반도는 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전례가 없는 4중, 5중 복합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 셈이다. 한 전직 외교부 장관은 28일 본지 통화에서 “현재 한반도 주변은 복합적이고 비상한 상황인 만큼 여기에 맞는 비상한 대응이 필요하다. 옛날 입던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나가서 될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국제 정치 전문가들은 최근 한반도 안보 상황이 근래 유례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에 대부분 동의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를 둘러싼 외교·안보 정세가 장기간 불확실해질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며 “그 방향이 부정적일 것이라는 점도 확실하다”고 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체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핵 개발에 나선 북한과 개혁·개방으로 내부 문제에 정신 없던 러시아, 한국의 역할 확대론이 나오던 미국 등 현 상황 자체는 1980년대 후반과 매우 비슷한 점이 있다”면서도 “당시는 냉전이 해체되는 안정적 방향으로 요동쳤다면, 지금은 그 역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에서는 한국과 주한 미군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윤석열-바이든-기시다 체제에서 급속한 진전을 이룬 한·미·일 3국 협력 체제가 다시 후퇴하거나, 바이든 정부가 약속한 확장 억제(핵우산)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다만 그간 글로벌 국제 질서의 핵심 역할을 해온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 등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라는 분석이다. 서정건 경희대 정외과 교수는 “미국은 원래 비개입주의, 미국 우선주의를 하던 나라였고 소련과 이념 전쟁을 하며 국제주의를 취했던 그 기간이 오히려 미국 전체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기간”이라고 했다. 한국의 국력이 과거와 달라진 만큼 능동적이고 실용적 접근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불확실성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 수석은 “대미(對美) 관계에서 견고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민주당보다 개인적 취향이 의사 결정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트럼프가 우리에게 더 용이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와는 ‘거래’를 통해 한국이 원하는 핵연료 재처리, 우라늄 농축 권리 등을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박인국 전 주유엔 대사는 “한미 공동 컨소시엄을 구성해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농축 우라늄 공급망을 재편하거나 영국·독일이 독과점하는 잠수함 시장에서 기술 동맹을 맺자는 비즈니스적 거래 제안은 오히려 해리스보다 트럼프가 수용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은 이르면 이번 주부터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관심이 우크라이나에 쏠려 있는 동안에 북한이 ‘스모킹 건’을 찾기 어려운 2010년 천안함 폭침식의 도발을 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다만 전쟁 장기화로 러시아 국력이 소진되고 있는 점과 북한군의 대남 군사적 대응이 일시적이나마 여의치 않을 수 있다는 점 등은 우리한테 나쁘지만은 않다는 분석이다. 천 전 수석은 “차제에 우크라이나와 방산 협력을 본격화하고 북한군이 투입된 러시아 영토에 우리 무기를 제공하기보다는 북한군이 배치되지 않은 지역에 제공하는 등의 지혜를 발휘할 요소는 많이 있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는 작년 3월 강제징용 관련 제3자 변제안으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한 후 주로 자민당 지한파를 상대로 내년 한일 수교 60주년을 대비해 왔다. 하지만 27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 여당이 참패해, 정계 개편이 될 경우 모든 것을 새롭게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다. 중국이 이 혼란을 틈타 대만해협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 정부는 시진핑 주석 3연임을 계기로 대만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며 통일 의지를 지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박인국 전 대사는 “일본은 오키나와 서남쪽 요나구니섬이 대만에서 116㎞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중국과 대만 전쟁이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전략을 연구해야 한다”며 “트럼프 집권 시에도 한일이 혼자 말하는 것보다 ‘원 보이스’를 내면 강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한일 연계 활동 전략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대외적으로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식의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는 시기가 지나갔다고 본다. 또 지금 같은 비상 시기에 대통령실과 외교부가 위기 의식을 갖고 대외 전략을 전면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넘기 위해서는 대통령실이 더 전략적이어야 한다”며 “용산 내부 소수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만으로는 이 파고를 넘기 힘들다. 안보 위기를 극복하는 특별 조직이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