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2019년 러스트 벨트인 오하이오주 리마를 방문해 미국의 주력 탱크 'M1 에이브럼스'를 생산하는 '리마 군용전차공장'을 둘러보는 모습. /AP 연합뉴스

4시간여 차를 몰고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를 다녀왔습니다. 누가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도시 아니랄까 봐 도시에서 가장 잘 보이는 산 중턱에 ‘Iron City(아이언 시티)’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 있더라구요.

명문 사립대인 카네기 멜론, 카네기 과학 센터, 유명 작가인 앤디 워홀 미술 박물관 등 남녀노소 모두 즐길 거리가 가득했는데요. 2박 3일간 머물면서 놀란 것은 잘 갖춘 박물관은 물론 도심 거리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넉 달 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도 고즈넉한 분위기에 좋긴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도시치고는 너무 한적해 의아했는데, 피츠버그도 비슷했습니다.

피츠버그나, 필라델피아는 모두 이번 대선의 격전지 중의 격전지라는 펜실베이니아주(州)의 도시입니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와 함께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 지대)에 속합니다.

펜실베이니아는 인구가 많아서 스윙스테이트(경합주) 7곳 가운데 선거인단이 19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러스트 벨트의 사람들, 즉 철강 및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의 처지를 가장 잘 개선해줄 것 같은 대선 후보가 최종적으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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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진 철강맨들

뉴욕타임스(NYT·이하 타임스)는 최근 러스트 벨트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제목은 ‘그들은 미 경제의 앞에 있었다. 지금은 뒤떨어져 있다(They Used to Be Ahead in the American Economy. Now They’ve Fallen Behind)’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남자(White men without a college degree)’는 미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7% 높은 임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피츠버그, 디트로이트의 철강·자동차 산업 노동자입니다.

이들은 고졸 이하 백인 여성은 물론이고, 대졸 백인 여성 보다도 잘 벌었습니다. 아시아·아프리카· 남미계 여성은 대졸이라도 평균 임금을 받지 못했으니, 백인 남성에게 유색 인종 여성들은 임금 면에서 전혀 부러움이나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피츠버그 등이 러스트벨트라 불리지만 1980년대만 해도 ‘스틸 벨트(Steel Belt·강철 지대)’라며 각광받았습니다.

백인 남성이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제너럴모터스(GM)나 US 스틸 등 주요 자동차 또는 철강 회사에서 기계공, 용접공 등 여러 직종의 근로자로 일하며 두둑한 월급봉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졸이 아니더라도 공장 감독 등 관리직까지 맡았습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과 지식 산업으로 변화하면서 학위 없는 백인 남성들의 임금은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떨어졌습니다.

◇돈 잘 버는 유색 인종·이민자가 얄밉다

반면, 대졸 여성들의 임금은 올랐습니다. 특히 대학 나온 아시아계 여성의 임금이 가파르게 우상향했습니다. 1990년 무렵부터는 이들 여성이 러스트 벨트 백인 남성의 임금을 넘어섰습니다. 2000년도 무렵에는 대학 나온 간호사·치위생사 여성이 고졸 백인 남성보다 잘 벌었습니다.

러스트 벨트 백인 남성들은 불만스러웠습니다. 물가는 오르는데 소득은 줄고 사회적 지위는 낮아졌습니다.

이들은 전에는 비교 대상으로 생각지도 않던 유색 인종 여성, 이민자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급부상하는 걸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도 바꿨습니다. 날이 갈수록 초라해지는 자신들의 처지를 몰라주는 정치인들이 야속했습니다.

철강 노조는 민주당과 가까웠고, 민주당도 “열심히 일하는 노조를 위한 정당”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민주당은 파란 작업복 입은 블루칼라 공업 노조보다는 실리콘밸리나 시애틀, 뉴욕이나 보스턴 등 서부나 동부 해안 지역 대도시의 고학력·고임금 엘리트와 더 가까운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러스트 벨트의 노조원들이 민주당에서 벗어나 공화당을 대안으로 여기는 경향이 생겼났습니다.

◇민주당과 멀어지는 러스트벨트 노조원들

하버드대 경제학자인 스테파니 스탠체바 교수는 타임스에 “자신이 쇠퇴하고 있다고 느끼면, 세상을 ‘제로섬(zero-sum)’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최근 설문조사 연구를 통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제로섬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정하기 때문에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이론입니다.

고졸 백인 남성들이 ‘어? 내 월급은 5000달러인데 왜 저 아시아 여성은 7000달러이지? 쟤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 아니야?’ ‘밥그릇을 빼앗겼다’는 식의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스탠체바 교수는 “제로섬은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좌파와 보수 진영 사이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성이 잘되면 여성도 잘되고 서로 다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보다는 쟤네가 잘되면 우리는 피해본다, 그러니 쟤들의 밥그릇을 우리가 차지해야 우리가 산다는 제로섬의 사고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친민주당 성향이던 펜실베이니아의 노조 아저씨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은 것처럼 느껴지는 고학력·고소득자 또는 친유색 인종·여성·이민자의 정당처럼 보이는 민주당에 반감을 갖고 공화당에 표를 던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2016년 대선 때도 펜실베이니아는 트럼프를 찍었고, 그 덕에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왼쪽)과 도널트 트럼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는 예일대 법대 출신의 초 엘리트 여성인 힐러리였습니다. 쇠퇴한 철강 도시에서 낮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로 아버지 노릇도 예전처럼 못하고, 총각의 경우는 장가도 잘 가지 못하는 처지에 빠진 남성들은 힐러리에게 표를 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랬던 펜실베이니아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 치러진 대선에서는 트럼프 대신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해리스냐 트럼프냐

한국계인 패티 김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이 지난달 30일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열린 미 민주당 대선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선거 유세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러스트 벨트의 남성들은 이번 선거에서는 누구를 찍을까요?

민주당 후보 해리스는 고학력·고임금, 첨단과학기술의 도시 실리콘 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 여성 검사 출신입니다.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자 최초의 아시아(인도)·아프리카(자메이카)계 부통령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당선되면 미국 최초의 여성 및 아시아·아프리카계 대통령이 됩니다.

공화당 트럼프는 뉴욕 부동산 재벌 출신입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2016년 펜실베이니아의 선택을 받았지만, 2020년에는 바이든에 패하고 이번에 다시 도전하는 대선 재수생입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세하다 암살될 뻔 하다가 살아남은 극적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여론조사를 하면 펜실베이니아에서 둘은 박빙이라고 합니다. 둘은 자신들이 노조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며 어필하고 있습니다.

타임스는 지난 9월 30일 ‘대통령(대선)을 위한 유일한 애국적 선택(The Only Patriotic Choice for President)’이라는 사설 제목으로 해리스를 공개 지지했습니다. 지구촌에 사는 한 명의 민주 시민으로서 이 사설을 읽어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물간 ‘철강 도시’ 피츠버그의 기계공 노조원이자 어린 두 아이의 40대 아버지라면 이 사설이 다소 공허하게 들릴 것 같았습니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협이다, 지성인이라면 해리스를 찍어달라, 나라를 생각해달라는 식의 호소는 먹물, 지식인층의 고상한 이야기 같이 동떨어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러스트 벨트 사람들은 현재 삶이 잿빛입니다. 손에 매일 기름 묻혀가며 일해도 형편은 나빠지기만 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애국을 말하고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보여주자고 하면, 얼만큼의 설득력이 있을까에 대해 의문스러웠습니다.

이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보다 나은 일자리, 임금, 삶의 질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불법 이민자 근절, 미국 우선주의, 외국 기업 팔 꺾어 미국 일자리 만들기 같은 이야기를 무리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도 형편이 갈수록 나빠지는 피츠버그 등의 유권자를 겨냥한 것입니다.

카멀라 해리스. /AFP 연합뉴스

◇소수의 스윙 보터가 국제정세도 바꾼다

선거는 정치권력을 바꾸는 수단으로서 기본 의의가 있다고 합니다. 선거 과정과 결과를 통해 국민이 무엇에 화가 나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높이 평가하는지 위정자와 국민 사이는 물론 국민 간에도 알게 해주는 소통의 창구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러스트벨트 이슈도 하나의 예입니다.

이번 11·5 미국 대선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양상은 물론 한반도 안보 환경까지 요동칠 것이라 전문가들은 전망합니다.

아이러니합니다. 이러한 전 세계적 퍼펙트 스톰을 일으킬 미 대선의 결과가 지극히 국내적이고 펜실베이니아 같은 주 단위의 지역 이슈에 따라 투표할 소수의 스윙 보터(Swing voter·경합주 유권자)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외세의 선거 개입...러시아는 트럼프, 이란은 해리스 당선 공작

왼쪽부터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이란의 알리 하메네이, 북한의 김정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에 따르면,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외세의 개입과 공작 활동이 포착됐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트럼프의 당선을, 이란은 해리스의 당선을 바라고 이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만들기 위한 각종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왜, 이란은 왜 각각 트럼프와 해리스의 당선을 바라는 걸까요? 그리고 중국은 누가 되길 바라고 있을까요?

다음 뉴스레터 외설(ExTalk)에서는 이 부분을 집중 조명하겠습니다. 더불어 이전 레터에서 예고했듯이 모사드 요원들이 평양에 비밀리에 날아가 대중동 미사일 수출 금지 협상을 벌였던 비사를 독자님들께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구독자가 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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