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의미있는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속히 악화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7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여당이 참패해 과반수 의석에 미달했고,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주한미군에 부정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의 ‘두 개의 전쟁’ 동시 발발을 가장 경계해왔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2년 넘게 진행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6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4년만의 방북으로 군사동맹을 복원한 북한이 최근 대규모 특수부대를 우크라이나 전선에 파병했습니다.

러시아와 북한이 동맹국으로 긴장 지수를 대폭 끌어올리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대응책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방어용 무기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한다는 계획을 공개, 러시아와 북한을 압박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방중 직후 이례적인 회의 열려

한미동맹 중심의 전략을 중심축으로 삼으면서도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을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옵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파병한 북한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럴 때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관계가 멀어진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 복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2013년 6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 이틀째인 이날 베이징 조어대(영빈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오찬을 마친 뒤 서로 준비한 선물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은 시 주석이 준비한 법랑 항아리, 오른쪽은 박 대통령이 준비한 찻잔 세트와 주칠함이다. 시 주석 왼쪽은 시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조선일보 DB

이런 상황에서 참고할 만한 일들이 11년 전에 있었습니다.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이어 7월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평화통일 포럼’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사에 기록될만한 행사였습니다. 6·25 전쟁 정전(停戰) 60주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중국 인민대학교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했기 때문입니다.

정전체제가 60년 동안 계속된 상황에서 한·중 양국이 6·25 전쟁의 여파와 한반도의 평화 전망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어서 조선일보는 이를 후원했습니다. 이 행사엔 우리측에서 현경대 평통 수석부의장, 박병석 국회 부의장, 안홍준 외통위원장, 권영세 대사, 이태환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김흥규 성신여대(현 아주대) 교수 등이 참석했습니다.

중국 측에서 천위루(陳雨露) 인민대 총장, 장롄구이(張璉瑰) 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추수롱 (楚树龙) 칭화대 교수 등이 나왔습니다. 양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번 포럼은 △2013년에 돌아본 6·25 전쟁과 그 함의△중북관계와 정전체제 종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동북아 정세와 한중관계의 미래 분야로 나눠 진행됐습니다. 60여년 전 중국의 참전으로 총부리를 겨눴던 양국이 정전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는 점에서 지금 돌이켜봐도 특별한 회의였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 정립 방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됐습니다.

◇장롄구이, “평화협정은 북핵 폐기와 동시에 돼야”

이날 회의에서 단연 시선을 끈 인물은 장롄구이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党校) 교수였습니다. 당교는 중국 공산당의 연수원으로 약 1억 명의 중 공산당원을 이념 교육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현 시진핑 주석이 중앙 당교 교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13년 7월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평화통일 포럼’. 6·25 전쟁 정전(停戰) 60주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중국 인민대학교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민주평통

이날 회의에 등장한 장 교수는 “현 상태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은 미국에게 ‘북한은 핵 보유국’이라고 인정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또, “미북간에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북한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막을 수 없게 된다”며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한반도 평화협정과 관련한 중국의 원칙은 두 가지라며 “평화협정은 반드시 한반도 관련국가가 함께 서명해야 하며 북한의 핵 폐기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포럼 현장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들어가며 기사를 쓰던 저는 북한을 비판한 장 교수의 발언을 듣자마자 “큰 기사가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1943년생으로 북한 김일성대에 유학했던 장 교수는 한반도를 전공한 원로 전문가입니다. 시진핑 주석의 당교 교장 시절부터 그에게 남북한 문제에 대해 조언, ‘시진핑의 개인 교사’ 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 헌법 기관과의 공개 포럼에서 북한을 비판한 것은 뉴스 가치가 컸습니다.

기사를 완전히 새로 고쳐서 장 교수의 발언을 기사의 맨 앞으로 올려서 서울로 송고했습니다. 본사 편집국에 전화해 “북한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 중국측으로부터 나왔으니 크게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날 저녁 편집국장 대행으로 야간 근무중이던 박정훈 부국장(현 논설실장)은 베이징으로 전화를 걸어서 최종판 부장 회의에서 이를 1면 톱기사로 결정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 독자들은 [中 공산당 원로학자도 미북 평화협정 반대 “평화협정 체결, 북핵 인정하는 것”] 이라는 제목의 1면 톱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는 평통과 인민대가 공동 주최한 정전체제 60주년 기념 포럼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 소속으로 시진핑 주석의 한반도 문제 개인교사 역할을 해 온 장롄구이 교수가 북한을 비판한 기사를 2013년 7월25일자 1면 톱 기사로 게재했다.

◇ 한중이 처음으로 정전체제 해법 논의

평통이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한·중 평화통일 포럼’에는 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와 대학생 등 25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60년 전에 한반도에서 싸웠던 두 나라가 정전체제 해법을 논의하는 회의였기에 8시간 동안 열띤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저녁 6시에 ‘종료 선언’이 나올 때까지 대부분의 참석자가 자리를 지켰습니다.

현경대 평통 수석 부의장은 개회사에서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는 남북뿐 아니라 동북아, 세계 평화와 직결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창룽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도 개회사에서 “중·한 관계가 역사상 가장 좋다”며 “정전 60주년을 맞아 과거를 뒤돌아보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박병석 국회 부의장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이 ‘중국의 꿈’과 함께 갈 수 있다”며 “북핵 불용에 대한 중·미 합의는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시사한다”고 밝혔습니다. 권영세 주중 대사는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날 청중석에서는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남북통일’이라는 데 동의하느냐”, “북한 핵 문제가 결국 한·중 간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중국이 반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민주평통 베이징협의회 관계자는 이날 “한·중 관계가 좋아졌다고 해도 정전 60주년과 통일이라는 민감한 주제로 베이징에서 대규모 한·중 회의를 개최하기는 쉽지 않았다”며 “중국 정부에서도 이번 회의 개최에 대해 민감하게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귀뜸해줬습니다.

초당파 외교안보 싱크탱크 ‘플라자 프로젝트’를 만들어 활동하는 김흥규 교수는 당시 포럼에서 “지난 달(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이 중국의 한반도 ‘제4원칙’의 지위로 부상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종전까지 중국의 한반도 정책 원칙은 비핵화, 혼란 방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등 세 가지였는데 평화통일이 추가됐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시진핑 주석이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중국 국민의 한반도에 대한 양대 희망은 비핵화와 평화통일”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한국에 의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북한에 대해선 대단히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청샤오허 교수는 “과거 중국은 한반도 원칙에서 ‘혼란 방지’를 가장 먼저 언급했지만 3차 핵실험 이후에는 ‘비핵화’를 우선순위에 올려놨다”고 밝혔습니다.

자칭궈 베이징대 교수가 2019년 12월 23일 서울 최종현학술원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그는 이 회의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화웨이 사용을 금지한다면 중국도 한국 기술과 장비 사용을 끊을 것”이라며 “한국은 중국 시장과 협력 가능성을 잃는 손해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DB

◇ 자칭궈 “북한에 보복할 것이라는 의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라”

평통과 인민대와의 포럼 석 달전에 나온 중국 베이징대 국제관계 대학원 자칭궈(賈慶國) 교수도 당시 중국이 한국과 밀착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1988년 미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베이징대에서 활동해 온 그는 한국에도 지인이 많은데, 당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2013년 4월 29일 그가 외교부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개최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21세기 전략적 사고와 신정부 외교비전’이라는 주제하에 열린 이 회의에서 “한국은 북한이 도발을 감행할 경우, 북한에 보복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해 청중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한국과 북한은 현재 신뢰구축의 4 단계중 최하위인 ‘부정적·최소 신뢰’단계에 있다며 “현 단계에서 한국의 결정과 의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 위원은 2013년 현 단계에서 한국이 군사력을 확충하고, 전투 준비를 완비하며, 북한이 도발할 경우 한국이 보복 조치를 취할 것임을 북한에 명확히 전달하고, 충돌이 일어날 경우 미국이나 중국 등 관련 국가들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도 국제적 지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빅터 차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도 참석했는데, 자 위원의 발언은 중국 공산당과 조율돼 있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는 평통, EAI 주최 회의 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도 이같은 얘기가 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고 갈 정도로 한중 관계는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중국의 전문가들로부터 “김정은 북한 정권은 우리에게도 골칫거리”라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2015년 천안문에서 열린 중국의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이후 여러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사드 사태, 미중 갈등 격화, 시진핑 주석의 연임 및 3연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국이 6차 핵실험까지 한 북한을 용인하고 한국과는 거리를 두는 상태가 계속돼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는 곧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합니다. 북한의 대규모 특수부대 러시아 파병으로 양국이 밀착하고, 그 결과 동북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중국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방중에 이어 6·25 정전체제까지 논할 정도로 긴밀했던 관계의 복원을 양국이 모색한다면 이는 북한에 적지 않은 압박이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로서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디자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결국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안보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