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열병식에 등장한 노동(화성-7형) 미사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대규모 전투 병력을 보낸 북한은 30여년 전에는 분쟁지인 중동·북아프리카에 미사일 등 각종 무기를 수출해 역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란과 시리아는 북한으로부터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핵 기술까지 이전 받아 원자로를 지었습니다.

이런 위협의 직접적인 대상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란·시리아의 손에 들어간 북한 미사일의 표적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국제사회가 급변하면서 북한은 조급해졌습니다. 중동의 반미 독재 국가와 손을 잡고 이들에 무기 공급량을 늘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군사 옵션도 검토했지만, 우선 대화로 문제를 풀어보려 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스라엘의 대북 미사일 협상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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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날아온 편지

이스라엘'모사드'의 인장.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은 뉴욕의 유엔대표부를 통해 북측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일단 말문을 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는 북한과 소통하는 유대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이 사업가를 통해 문을 두드렸습니다.

1992년 9월 29일 이스라엘 외무부와 대외첩보부 모사드의 예루살렘 본부로 각각 편지 한 통이 배달됐습니다.

발신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평양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평안 운산에 있는 금광이 있습니다. 개발에 10억 달러를 투자해보는 것 어떠십니까? 직접 와서 금광을 조사해보십시오.”

외무부는 고민 끝에 이 편지에 응답하기로 했습니다. 평양에 갈 사절단을 꾸렸습니다. 외무부의 아이탄 벤쭈르 국장과 아비 시톤 부국장, 2018년 현재 주일 이스라엘 대사이며 당시 베이징 주재 외교관이었던 루스 카하노프, 지질학자인 아모스 베인 박사와 모셰 시라브 박사가 사절단에 들어갔습니다다. 모사드도 극비리에 별도의 팀을 꾸렸습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이들에게 준 임무는 협상을 통해 북한의 대중동 무기 수출을 중단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운산 금광 개발에 10억 달러를 투자해달라고 했으니 이를 들어주는 대가로 대중동 무기 수출을 중단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이를 성사시키라는 것입니다. 미사일 수출을 금광 투자로 막겠다는 협상 작전이었습니다.

북한은 리비아, 이란, 시리아 등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중동 국가에 탄도미사일 ‘노동 1호(화성-7)’를 포함한 대량의 무기를 팔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은 애로우나 아이언돔 같은 미사일방어시스템(MD)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경을 맞댄 시리아가 노동 1호를 동시에 여러 발을 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1991년 이라크로부터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당한 전례가 있습니다. 사면이 적국으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에 노동 1호 미사일은 큰 위협이었습니다.


◇평안도 금광 개발과 北미사일 거래 협상

1992년 평양에 도착한 이스라엘 외무부의 아이탄 벤쭈르 국장의 모습. /이스라엘 일간 예디옷아흐로놋

외무부·모사드 사절단은 1992년 11월 1일 경유지인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베이징공항에 도착하자 한 직원이 VIP라운지로 안내했습니다.

라운지에서 이들을 맞이한 북한 장령(장성)이 자신을 ‘제너럴 차(General Cha)’라고 소개했습니다. 차 장령은 고려항공에 두 사절단을 태운 뒤 평양으로 갔습니다. 사절단은 차 장령이 데려간 호텔의 화려한 내부 장식에 적잖게 놀랐다고 합니다.

차 장령은 벤쭈르 국장을 방까지 안내했는데 거기 있는 침대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지도자)가 누워서 잤습네다.” 이스라엘의 적 우두머리가 잤던 침대에 이제 당신들이 자게 됐다며 농담을 던졌던 것입니다.

곧 사절단들은 김일성 전용 헬리콥터를 타고 서북부의 평안북도 운산 금광으로 갔습니다. “운산 금광 개발에 투자해주시오. 그 대가는 있을 겁니다.”

이란 등 적국에 노동 1호가 들어가는 걸 막을 수만 있다면 돈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절단의 지질학자들은 운산 금광은 잠재력이 있는 곳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북한은 협상하기에 못 미더운 대상” 미국의 경고

이란이 지난 4월 14일 새벽 드론과 미사일로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했다. 이란은 1980년대 이라크와 전쟁에서 북한의 군사 도움을 받은 이후 혈맹 수준으로 가까워졌다. 이후 양측은 미사일, 핵 기술 협력을 가속화했다. /로이터·X

귀국한 사절단은 방문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고 그 내용은 미국에까지 전달됐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양국은 이 문제를 놓고 협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92년 12월 9일, 벤쭈르 국장은 훗날 국장에 취임하는 에프라임 할레비 모사비 부국장과 함께 미국 워싱턴 D.C.로 날아갔습니다.

미국은 북한을 신뢰할 수 없으니 협상하지 말라, 큰일 난다며 이스라엘의 협상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벤쭈르 국장을 필두로 외무부는 북한이 무기 수출을 하는 건 결국 돈이 주 요인이니 돈을 주면 멈출 것이라며 미국의 조언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 할레비 부국장 등 모사드 쪽은 북한과의 협상은 합의가 타결되더라도 일시적이거나 눈속임용일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 갈등에도 이스라엘은 북한과 협상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3년 3월 12일 북한은 덜컥 핵확산방지조약(NPT·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탈퇴 선언을 했습니다. 북·미는 물론 북한·이스라엘 관계도 경색됐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워런 크리스토퍼는 이스라엘에 대북 협상을 완전히 끊으라고 했습니다. 미국이 NPT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북한과 별도의 협상을 하고 있으면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벤쭈르 국장은 협상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차 장령을 만나 이틀간 네 가지 안건에 초점을 맞춰 협상을 벌였습니다. 첫째는 북한의 미사일 수출, 둘째는 운산 금광 개발, 셋째는 이스라엘의 차관 제공, 넷째는 국교 수립이었습니다.

양국은 협상에서 상당 수준 도달할 정도로 합의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미 국무부는 벤쭈르 국장을 불러들였습니다. 국무부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북한이 NPT 탈퇴를 하더라도 서방 세계와 교류할 수 있다는 허상을 갖게 할 수 있다면서 더 이상 북과 접촉하지 말라고 언질을 놓았습니다.

장성택(사진 왼쪽), 김경희

북한 측은 1993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차 장령은 김일성이 그의 딸인 김경희와 그의 남편 장성택을 협상 대표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협상 진척을 재촉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럽에 대사로 있는 김일성의 아들이자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에 접촉해 협상을 타진했습니다. 미국의 반대에도 모든 채널을 동원해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던 것입니다.


◇대화론자 라빈 총리의 협상 중단 결심

1993년 9월 13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이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웃으며 악수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

하지만 그달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핵과 관련해 북한과 미국이 계속해 협상 줄다리기를 하고 있고, 북한이 NPT에서 탈퇴하는 행태를 보면서 협상을 해도 득보다 실이 많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운산 금광에 거액을 쏟아붓고도 훗날 모종의 이유로 협약이 파기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북한이 약속과 달리 몰래 시리아 등에 노동 1호 미사일을 수출할 수도 있었습니다.

라빈 총리는 무력 만능주의자도 대화 회의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1 좌파 정당 ‘하 아보다(노동당)’ 소속의 대표적 비둘기파였습니다.

그는 원수인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그 공로로 1994년 노벨평화상도 받았습니다. 전쟁을 치렀던 요르단과 화해한 뒤 수교하며 안보 위험 요소를 크게 줄이는 성과도 거뒀습니다. 평화에 대한 신념을 지키다 1995년 11월 4일 극우 유대인 청년의 총에 암살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북한과의 협상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이르른 것입니다. 대신 이스라엘은 자주 국방만이 살길이라며 핵심 무기는 자체 개발하는 기조를 밀고나갔습니다. 지금은 애로우, 아이언돔 등의 다층 방공망 체계를 갖추고 이란의 미사일 공격에 맞서고 있습니다.


◇적에 전략무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시리아 핵시설 파괴 전과후 모습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북한으로부터 핵 기술, 미사일을 건네 받은 시리아 등에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기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2007년 시리아의 핵 시설을 전투기로 기습 폭격했습니다.

한적한 교외 지역의 수상한 건물이 북한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건설되고 있는 핵시설임을 확인할 결정적 정황을 잡고, 그 시설을 제거하는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미국은 폭격 작전을 결사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접경국인 시리아 아사드 독재 정권의 손에 전략무기인 핵무기가 들어간다는 건 이스라엘 안보에 치명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강행을 예고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미국은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19년 4월 30일 박명국 북한 외무성 부상과 파이살 미크다드 시리아 외무 차관이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만나 회담을 하고 있는 모습.

핵 시설을 짓기만 하면 가차없이 폭격하는 이스라엘의 예방 전쟁 전략에 시리아는 그 뒤로 핵개발을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최대 분쟁지인 중동에 핵무기가 이스라엘 말고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현재 없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리아 핵시설을 정밀 폭격해 잿더미로 만드는 작전 동영상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뉴스레터 외설(ExTalk)’ 구독자가 되시면 해당 동영상과 함께 모사드가 어떻게 시리아와 북한의 핵무기 커넥션을 포착하고 전투기 폭격 작전을 실행에 옮겼는지에 대한 비사(‘강한이스라엘 군대의 비밀’ 발췌)의 요약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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