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워싱턴 D.C.는 행정수도이고, 미국의 진짜 수도이자 대표 도시는 뉴욕이라고 합니다.
워싱턴 D.C.는 도심이라해도 여기가 ‘미국의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도 별로 없고 상점도 드문 드문합니다. 한산합니다.
공무원들 집에가는 오후 4시 무렵이 되면 퇴근 차량으로 버지니아·메릴랜드로 빠지는 길이 북적였다가 저녁이 되면 썰렁해집니다.
D.C. 인구는 68만명 밖에 되지 않죠. 대부분 버지니아 알링턴·페어팩스 카운티, 매릴랜드 몽고메리·프린스조지스·하워드 카운티에 살면서 D.C.로 출퇴근 합니다.
반면 뉴욕은 거리를 바로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복잡합니다. 사람 사이를 비집고 요리조리 피해다녀야 합니다. 인구만 900만명이고 하루에도 수십만의 관광객과 외지인들이 뉴욕 맨해튼으로 몰립니다.
워싱턴 D.C.에선 점심 장사만 하고 문 닫는 샌드위치 델리 가게가 많지만 뉴욕에선 자정 넘어서까지 영업하는 식당이 수두룩 합니다. 브로드웨이부터 월스트리트 증권가까지 다 가진 뉴욕은 말 그대로 미국의 대표 메트로폴리탄(대도시)이고, 세계의 제1의 도시입니다.
그런 도시에서 대로를 막고 행사를 치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안 그래도 ‘교통 지옥’이란 말이 나올 정도인데, 대로를 수시간 통제하면 그 정도는 더 심해집니다. 시민들은 불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뉴욕은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였던 지난 11월 11일 관광객이 1년 365일 몰리는 5번가(5th Avenue)를 낮 12시 무렵부터 4시간 넘게 통제했습니다.
이날이 퇴역 군인을 기리는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이었기 때문입니다. 퇴역 군인을 기리는 이 날을 널리 알리고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영웅’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자 맨해튼을 종단하는 노른자위 대로를 막고 대규모 행진 행사를 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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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향군인의 날은 연방 정부 휴일
미국은 50주마다 법이 달라서 지키는 휴일도 다릅니다. 모든 주에 적용되는 연방 휴일은 아무 기념일이나 될 수 없죠. 그런데 재향군인의 날은 연방 휴일입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제가 사는 버지니아주도 모든 공립학교와 관공서가 휴일이었습니다. 연휴를 맞아 10~11일 뉴욕을 찾았습니다.
버지니아나 워싱턴 D.C.에서 운전할 때랑 다르게 맨해튼 시내에서 운전을 하면 ‘콘크리트 정글(Concrete jungle)’이란 노랫말을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신호를 무시하고 차로로 뛰어들고, 조금이라도 굼뜨다 싶으면 뒷차는 사정없이 경적을 울립니다.
그런데 이날 오전 10시무렵부터 NYPD(뉴욕경찰) 글자가 적힌 차들이 5번가로 몰려들었습니다. 맨해튼을 종단하는 5번가를 가로지르는 길목마다 경찰 차들이 서서 차량 통행을 막았습니다.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동안 대규모 재향군인 행진식이 있어서였습니다.
5번가에 있는 뉴욕공립도서관 계단에는 행사 1, 2시간 전부터 간이 의자를 펴놓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현역 시절에 입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입고 나온 백발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피부색·출신 불문 성조기 흔들며 ‘USA’ 연호
행진 시작할 때부터 쭉 지켜봤는데요, 맨해튼 한복판에서 군중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행진하는 재향 군인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눈가와 입가는 쭈글쭈글하게 주름 잡혀 있었고, 머리 숱은 듬성듬성 했지만, 눈빛만큼은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뚜렷하게 정면을 직시하며 살아있었습니다.
한 해병대 재향 군인은 행진 차량 위에서 손을 흔들다가 군중 속에 군복을 입고 손을 흔드는 노부부가 보이자 차에게 뛰어내려와 경례를 하고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나누다가 다시 행진 대열로 돌아갔습니다.
대로 양가 상점의 주인·직원들, 뉴욕 시민은 물론 저와 같은 외국인 방문객들까지 대로가에 세워진 바리케이드에 달라붙어 재향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보냈습니다. 대로 양쪽에는 커다란 성조기가 끝없이 줄지어 게양돼 있었습니다.
검은 옷에 귀밑 머리를 한 유대인부터 아프리카계, 페루 등 중남미계 미국인들까지 피부색과 인종, 출신 등 가릴 것 없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성조기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한 미국인 지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더라고요. “요즘 테슬라, 엔비디아, 비트코인이 제일 핫한 것들인데, 미국 최고의 브랜드는 성조기”라고요.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재향군인들의 피부색도 다 달랐습니다. 환갑은 족히 넘어보이는 퇴역 군인과 함께 여드름 자국의 청년 현역 군인들이 같이 행진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재향군인뿐 아니라 경찰, 소방관 등 제복을 입은 직업인을 기념하는 행진도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정글’도 제복에 존경을 보낸다
뉴욕하면, 분초까지 나눠 촌음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손실, 교통 체증 악화, 불편함 등을 이유로 퇴역 군인을 기리는 재향군인의 날을 위해 대낮에 대로를 막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직감이 틀렸습니다. 재향군인의 날에 각주 각시마다 나름의 행사를 크고 작게 하는데, 대표 행사는 뉴욕의 5번가 행진이라고 합니다. 뉴욕만의 결정은 아니고 연방 정부와 의회 차원의 의견이 반영된 것입니다.
대표 행사를 대표 도시에서 하기로 한 것은 미국인들이 이 날을 얼마나 중시여기는지,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하더라도 지켜야할 가치는 지켜야하고 노력해야한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맨해튼에선 마라톤 대회도 열리고 각종 행사가 도로 통제하에 열리곤 합니다. 혹자는 도로 하나 막는 걸 가지고 뭘 그러냐며 과도한 의미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재향군인을 위해 대도시 주요 도로를 막고 장시간 행사를 여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분명 눈 여겨 볼만한 것 같습니다.
재향군인의 날은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파리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하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 의회가 1926년 ‘휴전 기념일(Armistice Day)’을 지정한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다 2차 세계 대전, 1953년 정전 체결된 6·25전쟁 등을 포함한 모든 전쟁의 퇴역 군인을 기념하는 날로 확장돼 지금의 재향군인의 날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5월 마지막주 월요일의 메모리얼 데이와 셋째주 토요일 국군의날과도 구별해 각별히 거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재향군인의 날 행사였지만, 미 퇴역군인 가운데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도 있는만큼 저도 이날 시가행진 대열을 향해 손가락으로 승리(Victory)의 ‘V(브이)’자를 만들어 보내주었습니다. 한국의 재향군인 ‘영웅’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국군의날 광화문 시가행진에 대하여
저도 미국에서 뉴스로만 접했는데 지난해도 그렇고 올해도 한국 국군의날 광화문 시가행진을 비난하는 무리들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댓글을 달아 의견을 나눠주세요. 저의 이메일 stonebird@chosun.com 로 주셔도 좋습니다.
한국은 재향군인의날이 10월 8일인데 알고 계셨나요? 이번에 뉴욕에서 행사를 봐서 그런지 우리의 재향군인의 날도 좀더 잘 알려지고 행사도 그럴싸하게 치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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