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로 가는 차를 얻어탔다가 사람을 사귀었습니다. 미국 초당파 비정부 기구인 북한인권위원회(HRNK)의 회장 그레그 스칼라튜(Greg Scarlatoiu) 박사입니다.
좁은 차에서 단둘이 3시간 내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970년 루마니아 태생인 그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집권 1965~1989년) 공산 정권 아래서 컸습니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방북해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주체사상을 루마니아 통치에 적용시킨 동구권의 대표적인 독재자입니다. 1989년 유혈 혁명이 일어나 차우셰스쿠는 총살되고 공산 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은 직후 루마니아와 수교를 맺었습니다.
스칼라튜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대를 다니며 반공·자유 민주화 운동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역사의 격랑을 몸소 겪은 그는 북한과 대비되는 한국의 발전상을 공부하고자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한국 정부 초청 루마니아 1호 장학생에 뽑혀 서울대 외교학과 1990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 동구권 나라가 개혁·개방화의 단계로 접어들자 속속 이들 나라와 수교를 맺고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을 뽑았습니다.
스칼라튜는 그렇게 김포공항에 발을 딛으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현재 버지니아 애슈번에 함께 사는 그의 아내도 한국인입니다. 그 사이에서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서울대 공부를 마치고 미 터프츠대 플레처 스쿨에서 수미 테리 전 미 CIA(중앙정보국) 분석관 등과 함께 학위를 했습니다. 루마니아 공산 정권에서 인민의 처참함을 직접 겪고 그 정권의 몰락까지 목격한 그는 북한 인권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HRNK는 미 국무부·국제개발처(USAID) 고위 관료, 기업인, 학자들이 의기 투합해 2001년 세운 국제 기구입니다. 스칼라튜는 2011년 HRNK에 합류해 수많은 탈북자들을 만나 정치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유엔, 미 의회에서 발표해왔습니다.
미국 국적을 얻은 그는 HRNK 사무총장으로 오래 활동해왔으며 지난 10월 이사회 만장일치로 HRNK 회장에 임명됐습니다.
◇트럼프와 탈북 꽃제비 지성호 만남 성사
펜실베이니아 일정 이후 워싱턴 DC 백악관 인근 HRNK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트럼프 당선으로 새 행정부가 출범할 참이어서 그 또한 상당히 분주해보였습니다.
스칼라튜는 트럼프 행정부 1기 때던 2018년 꽃제비 탈북자인 지성호 전 국회의원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 그리고 지성호 전 의원의 미 의회 국정연설 참석을 이끌어냈습니다.
국회 입성 전으로, 나우(NAUH)라는 북한 인권 단체 활동을 하던 지 전 의원은 2018년 1월 30일 미 의회 국정연설에 초대 받았고 현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와 함께 모든 의원과 참석자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트럼프의 호명에 지 전 의원이 일어나 목발을 힘차게 들어 올려 흔드는 장면은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지 전 의원은 북한에서 꽃제비로 구걸하며 살았고, 선로에서 굶주림으로 탈진해 기절했다가 지나가던 열차에 다리를 잃었습니다.
당시 트럼프는 “지씨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면서 다른 탈북자들을 돕고, 북한에 북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실을 알린다”면서 “지씨의 ‘위대한 희생’은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씨의 스토리는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 영혼의 열망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칼라튜는 그날을 회상하며 “백악관 측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비밀 작전하듯이 나의 친애하는 친구 지성호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북한과 어떻게든 관계를 만들어보려는 문재인 정부가 방해할까 우려돼 지성호를 비롯해 당시 일정을 조율하던 이들과 보안 메신저로만 연락을 주고 받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초대 국무장관 지명 루비오는 ‘북한 인권 전문가’
트럼프는 신임 국무장관에 연방 상원의원 마코 루비오(공화당·플로리다)를 지명했습니다. 스칼라튜는 루비오 측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칼라튜는 “루비오는 이번 회기에서 북한인권법 재승인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인물”이라면서 “그는 북한 인권 문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루비오는 올 3월 6·25전쟁 이후 북한에 가족을 남겨둔 한국계 미국인을 위한 ‘이산가족 국가 등록법 (Divided Families National Registry Act)’을 팀 케인(민주당·버지니아) 의원과 함께 상원에서 대표로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루비오는 발의 당시 성명에서 “한국 전쟁과 김정은의 억압적인 정권으로 인해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한국계 미국인 가족들을 지원하는 노력은 북한과의 잠재적인 대화에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 법안이 이러한 목적을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미북 간 이산가족 상봉 추진 의사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번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북 간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탈북한 주쿠바 북한 외교관이 트럼프 국정연설에 선다면?
스칼라튜가 곧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도 2018년 때처럼 북한 인권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이벤트를 준비 중이지는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는 크게 웃으며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뭔가 구상을 하고 진행 중인 것 같았습니다.
HRNK 사무실을 나와 다음 약속을 위해 백악관 북쪽 라파예트 스퀘어를 지나가면서 상상해봤습니다. 국무장관 지명자인 루비오는 1971년생으로, 쿠바 이민자 집안 출신입니다.
부친은 바텐더, 모친은 호텔 청소부로 일하며 루비오를 상원의원으로까지 키웠습니다.
최근 망명한 탈북자에는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정치 담당 참사로 근무하다 작년 11월 자유를 찾은 리일규씨가 있습니다. 그는 월급 67만원을 받으며 쿠바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걸맞은 보수를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북한 외교관은 넥타이를 맨 꽃제비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리일규씨처럼 외교관이나 당 간부 관리 등 엘리트 층의 탈북 행렬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이럴 때 ‘넥타이 맨 꽃제비’ 출신 리일규씨가 지난 2018년 ‘목발 든 꽃제비’ 지성호 전 의원처럼 트럼프 국정연설에 초대돼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주먹을 들어올리면 어떨까요?
1기 때보다 더욱 강력해져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면 전 세계 흩어져 있는 또다른 ‘넥타이 맨 꽃제비’ 북한 외교관들이 정신을 번쩍 차릴지 모릅니다. 1기 때 국정연설 멤버 지성호 전 의원, 그리고 역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전 의원이 함께해도 효과는 큰 듯합니다.
국정연설이 아니더라도 쿠바 출신으로 북한 인권 운동에 앞장선 중견 상원 의원 출신 미 국무장관과 리일규, 태영호 등 탈북 외교관들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상당할 것 같습니다.
트럼프 시대, 처참한 북한 주민의 인권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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