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참석자 없이 ‘반쪽 추도식’ -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에서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묵념하고 있다. 불참한 한국 정부 측 인사들과 한국인 강제 노역자 유족들의 자리는 비어 있다. 이날 행사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은 일제강점기 사도광산에서 행해진 한국인 강제 동원을 언급하지 않았다. /AP 연합뉴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강제 노역했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에서 한국과 일본, 양국이 24일 함께 추도식을 개최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추도식은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도 광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일본이 약속한 조치였다.

하지만 일본이 추도식에 202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전력이 있는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을 보내는 등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국 측은 이날 추도식에 불참했다. 박철희 주일대사는 25일 사도 광산에서 한국에서 간 유족들과 함께 별도의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과거사 문제와 관련된 한국의 대일 외교가 또다시 일본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한국은 2015년 한국인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은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했다가 이후 일본이 강제 노역을 축소·부정하는 등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황을 겪은 바 있다.

이날 추도식에서 이쿠이나 정무관은 “광산 노동자 중에는 1940년대 한반도에서 온 많은 분이 포함돼 있었다”며 “갱 내의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힘든 노동에 종사했다”고 말했다. 또 “종전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감스럽게도 이 땅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강제 동원’ 등 강제성과 관련된 표현은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이처럼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 문제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처음이다. 주한 일본대사관이 우리 정부의 이번 행사 불참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밝히면서 양국의 협력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이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 개발 종합 센터에서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뉴스1

일본 측 ‘사도 광산 추도식’ 실행위원회는 24일 오후 사도시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이쿠이나 외무성 정무관, 하나즈미 히데요 니가타현 지사, 오타나베 류고 사토시 시장 등이 참석했다. 10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추도식은 한국 측 불참으로 40여 석이 빈 채로 진행됐다.

이쿠이나 정무관은 이날 “에도 시대 때 무슈쿠닌이란 사람들도 (사도) 광산에서 일했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무슈쿠닌은 에도 시대에 집 없이 떠돌던 사람을 지칭한다. 이어 강제 노역 조선인에 대해서는 “조선반도(한반도를 지칭)에서 온 노동자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 탄광의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했다”고 했다. 강제성과 관련해서는 “1940년대 우리나라(일본)의 전시(戰時) 노동자 정책에 따라 조선 반도에서 왔다”며 언급을 회피했다.

당초 우리 정부는 한국인 피해자를 위한 추도식 개최와 강제 노역 피해자 관련 전시물 설치를 ‘담보’로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했다. 윤석열 정부는 야당의 강한 반발도 감수했는데, 이는 일본의 성의 있는 태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무성의한 모습을 계속 보였다. 사도 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은 지난 7월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을 설치했는데, 낡아 보이는 전시실 한쪽에 알림판 패널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강제성’을 뜻하는 표현도 없었다. 현장을 다녀온 한 전문가는 “일본 정부가 왜 이런 식으로 일하는지 모르겠다. 마지못해 한 듯, 아무런 성의가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형식적인 전시에 이어 추도식에는 중앙정부 대표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전력이 있는 인사를 보냄으로써 ‘반쪽짜리’ 행사가 돼버렸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일 관계는 그동안 한국 측의 노력으로 진전될 수 있었는데, 일본이 이에 제대로 호응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은 군함도 문제에서도 일본의 약속을 믿고 협력했다가 ‘배신’당한 경험이 있다. 2013년 아베 신조 내각이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시대의 산업혁명 유산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결정했다.

박근혜 정부는 처음엔 이에 반대했었다. 아베 내각이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어두운 역사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아베 내각은 2015년 한국인 강제 노역을 인정하고, 이 내용이 포함된 정보센터 설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2017년, 2019년 유네스코에 보고서를 제출할 때 ‘강제 노역’ 표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유네스코가 일본의 약속 위반을 지적하며 “등재된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할 정도로 명백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후에도 일본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2020년 군함도를 알리는 근대산업시설 전시관을 도쿄에 개관하면서 “군함도에서 한국인 차별이 없었다”는 전시물을 소개, 강제 노역을 은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군함도의 유네스코 등재 문제로 일본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던 인사들 중 한 명이 조태열 현 외교장관이다. 당시 그는 외교부 2차관이었다. 이번에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자 조태열 장관이 ‘추도식 불참’을 주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과 일본 정부 간에 잠재해 있던 사도 광산 문제가 이번에 폭발하면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양국 간 이상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을 우리 정부가 이행하는 ‘제3자 변제안’으로 문재인 정부 때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한일 관계를 정상화시켰다. 이후에도 양국은 과거사 문제로 여러 갈등이 있었지만, 이를 표면화시키지 않은 채 물밑에서 상호 입장을 조율해왔다.

대통령실은 이번 사태를 다른 사안과 연계시키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게 못마땅하지만, 이를 외교·안보 사안과 연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과는 지난해 3월 제3자 변제안을 바탕으로 한 한일 관계 정상화,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3국 협정을 바탕으로 신뢰가 축적돼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고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서 역주행할 경우에 한·일 관계가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사도광산

일본 니가타현(新潟縣) 사도섬에 있는 사도광산(佐渡鑛山)은 17세기 에도 시대에는 일본 최대 금광이자 세계적인 금광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리·철·아연 등을 채굴했는데 1939년 이후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