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14일은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시작된 지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9년 14일, 재일교포 975명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에서 출발한 귀국선을 타고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1984년까지 25년 동안 약 9만3000 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됐습니다. 귀국선은 약 200차례에 걸쳐 운항되었습니다.

1962년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생모 고용희가 10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탔습니다. 1959년부터 25년에 걸쳐 재일교포들이 북송된 사건은 북한 정부가 끌고 일본 정부가 등 떠민 합작 사업으로 희대의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가는 첫 '귀국선'에 재일 동포들이 승선한 가운데 환송행사가 열리고 있다. 선박 옆면에는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마이니치신문

2018년 6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할 때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던 취재 아이템들이 몇 개 있었는데, 재일교포 북송 사업은 취재 리스트의 상단에 있었습니다.

◇ 김정은 정권에 손해배상 청구한 가와사키씨

도쿄에 부임한 후 얼마 안돼 재일교포 북송 문제를 취재할 계기가 생겼습니다. 2018년 8월 말, 조총련계 조선학교 고3 때 북송 사업에 속아서 북한에 건너갔다가 2003년 43년 만에 탈북한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씨 사연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당시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들을 모아 김정은 정권 앞으로 총 5억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냈는데, 관련 기사가 조선일보 제휴사인 마이니치 신문에 실렸습니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서 이 기사를 읽자마자 마이니치 신문사 편집국 4층의 사회부로 올라갔습니다. (조선일보 도쿄 지국은 마이니치 신문사 건물 3층에 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 데스크를 통해 그의 연락처를 확보하고 이같은 내용의 기사를 써서 서울로 보냈습니다.

“북한 허위 선전에 속았다” 日 거주 탈북자 5명, 북한 상대로 첫 소송 제기

재일 교포 북송 사업 당시 북한에 가서 생활하다가 탈북해 일본에 거주하는 남녀 5명이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8월 21일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6)씨 등 57~77세의 탈북자들은 “북한이 ‘지상 낙원’이라고 재일 한국인을 속여서 ‘귀환 사업’을 하는 데 참가해 인권을 억압당했다”며 총 5억엔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냈다.

재일 교포 탈북자가 일본 내에서 친북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지만,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소송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2009년 세 살 때 부모와 함께 북송 사업으로 입북했다가 2003년 일본으로 돌아온 탈북자가 조총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기각한 바 있다.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가와사키씨 등은 1960~1970년대 북한에 갔다가 2000년대 탈북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충분한 식량을 배급받지 못한 채 저항하다가 탄압받았으며 출국을 금지당했다고 주장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 중 한 명이 “가혹한 생활로 부모는 원통하게 일생을 마쳤다. 인생을 돌려달라고 부르짖고 싶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가와사키씨를 비롯한 탈북자들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에 북한의 인권 침해를 규명해 달라고 요청한 데 이어 일본의 변호사 단체에 북한에 의한 인권 침해를 다뤄달라고 한 바 있다.

이 소송은 일본의 재판권이 외국 정부에 미치는지와 시효가 성립되는지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변호인단은 소송 진행상 문제점이 일부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실질적 심리에 빨리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탈북자 원고 측 변호사는 “법원이 북한에 의한 인권 침해의 위법성을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북송 사업으로 일본인 아내를 포함해 9만3000여 명이 니가타(新潟)현에서 만경봉호 등을 타고 북으로 건너갔다. 일본에는 이들 외에도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돌아온 탈북자들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유사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1959년 12월 14일, 니가타항을 출항하는 제1호 북송선 쿠릴리온호와 토보리스크호/나무위키

기사를 쓴 데 이어서 9월 3일 도쿄 도심에서 가까운 키바(木場)에서 가와사키씨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가와사키씨의 삶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그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다음 해인 1960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북송선을 타고 청진으로 갔습니다. 원래는 자신이 태어난 일본을 떠나 북한에 가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나 한국에서 4·19가 발생하자 생각을 바꿨습니다. 조총련이 “한국은 이승만 체제가 곧 붕괴되고 사회주의 통일이 될 텐데 미리 북한에 가서 이를 준비하자”고 선동하자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북한행을 말렸지만, 결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조센징’에 대한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별도 북한을 택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와사키씨는 1987년 북한에서 결혼해 1남 4녀를 낳았습니다. 남편이 사망하고 1990년대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탈북을 결심해 2003년 초반 딸 하나를 데리고 사선(死線)을 건넜습니다.

2004년 일본에 정착한 그는 2007년 ‘일본인’이 됐습니다.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은 북송 사업 피해자를 돕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일본 국적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북한의 위협을 받거나 위해를 당하게 되면 일본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환 사업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열심히 나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북송 59년 만에 다시 니가타항 찾은 가와사키씨

가와사키씨는 20세기 조선이 일본제국에 병탄(倂呑)되고, 한반도가 분단되고,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만든 비극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일교포 북송 사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 가와사키씨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2019년 12월은 북송사업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가와사키씨에게 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방문해 회상하는 기획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픈 기억에도 불구, 니가타항에서 북송사업의 실상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2019년 11월 29일 가와사키씨와 함께 그가 59년 전에 북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아갔습니다. 도쿄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니가타로 가는 동안 그는 회한에 젖은 듯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니가타항의 날씨는 맑았습니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았습니다. 그는 12월 14일 ‘재일교포 귀환 사업’ 시작 60년을 앞두고 악몽처럼 남아 있는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조선학교 고3때 북한에 속아서 일본을 떠났다가 43년만에 탈북한 재일교포 가와사키 에이코씨가 2019년 11월 북송사업 60주년을 앞두고 자신이 귀국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1960년 북송선이 떠날 때는 굉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 취주악단이 나와서 계속 쿵작거렸습니다. 지상 낙원에 간다는 들뜬 분위기였지요.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나와서 열성적으로 환송했습니다.”

가와사키씨 등을 태운 북송선은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의 인도를 받아서 출항했습니다. 배가 일본 영해를 벗어날 때 일본 함정에서 “이제 공해로 들어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2박3일간 운항했던 북송선에서 북한 관리들로부터 처음 받은 지시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모두 바다에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일본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와사키씨는 그때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했습니다. “왜 먹는 음식을 일본 식품이라고 버리라고 하는 걸까. 그러면 ‘메이드 인 재팬’인 재일교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가와사키씨는 배가 청진항에 접근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청진항 일대가 온통 잿빛이었고 높은 빌딩이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영 인파 속 사람들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거나 양말을 신은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지상 천국’이라던 선전과는 딴판이었습니다.

가와사키씨는 북송선이 청진항 부두에 접안할 무렵 선착장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조선학교 선배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도착했던 그 선배는 배에 타고 있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북한 군인들이 못 알아듣도록 일본어로 “내리지 말라”고 외쳤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

◇도착 첫날부터 먹을 것 없어 “속았다”고 느껴

배에서 내린 재일교포들이 “속은 것 아니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집단 합숙소에 들어간 가와사키씨와 재일교포들은 첫날 저녁부터 먹을 것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생지옥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북한으로부터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청진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본의 가족들이 북한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은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소학교 4학년인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 만나자는 내용만 계속 써서 보냈습니다. 절대 북한에 오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부모는 딸이 ‘지옥에서 보낸 편지’의 의미를 깨닫고 북한행을 단념했습니다.

< 재일교포 북송 65주년 ➁는 다음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