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8년 11월 14일 아침의 일입니다. 여느 때처럼 조선일보 도쿄 지국에 출근, 커피 한 잔을 책상에 놓고 조간신문들을 넘기며 일본의 동향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을 넘기다가 17 페이지에서 제 시선을 한동안 고정시키는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낯익은 두 외교관이 악수하는 사진이었습니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경전(經典)으로 평가받는 ‘김대중- 오부치’ 선언 초안을 만들었던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사사에 겐이치로 전 외무성 차관(현 일본 국제문제연구소 이사장)의 대담이 전면에 걸쳐 실린 겁니다.

아사히 신문 2018년 11월 14일자 17면에 실린 특별 대담. 아사히신문은 한일을 대표해 각각 45세, 47세의 과장 때 ‘김대중- 오부치’ 선언 초안을 만들었던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사사에 겐이치로 전 외무성 차관의 대담을 전면에 걸쳐 게재했다./하코다 테츠야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제공

◇45세, 47세 과장 두 명이 역사적 선언 만들어

아사히신문은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주년을 맞아 1998년 각각 45세, 47세의 나이에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공식 명칭)’을 설계한 두 사람을 초청, 과거를 돌이켜보며 미래를 내다보는 기획을 했습니다.

당시 박준우 외교부 동북아1과장과 사사에 외무성 북동아시아과장은 밀고 당기는 협상끝에 역사적인 문서의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 ‘사죄’를 포함, 정치·경제 등 5개 분야에서 광범위한 교류 확대를 담은 43개 항목의 행동계획을 만들었습니다. (아키히토 천황이 한일 공동 월드컵이 열린 2002년에 방한하는 방안도 논의했습니다.)

1998년 10월 8일 도쿄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함께 이를 발표,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불립니다. 오부치 총리는 이 문서에서 “식민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일관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문서입니다. 일본 언론계의 대표적인 한국통인 하코다 테츠야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 대담에서 박 전 수석은 이같이 말했습니다.

“한일 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서명하는 문서이므로 일본어 ‘오와비(お詫び)’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전에는 사과로 번역했으나, (더욱 의미가 큰) 사죄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쓰게 됐다. 이에 대해 일본 측과 최종 합의한 것은 김 대통령이 하네다 공항에서 영빈관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사죄’라는 단어를 문서에 포함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회고입니다.

사사에 전 차관은 “크게 볼 때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 것 보다 문서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행동계획이 만들어지면서 한국측이 영단(英斷)을 내려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착수했다”고 했습니다. 일본 외교관답지 않게 직선적인 성격의 사사에 전 차관은 “일본에서 보면, 정부에 따라 정책이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문제를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존심 싸움도 했습니다. 하코다 논설위원이 후배 외교관들에 대한 생각을 묻자, 박 전 수석은 “한국도, 일본도 (외교관의) 외교에 관한 권한이 축소된 시대”라고 했다. 그러자 사사에 전 차관이 반박했습니다. “나는 일본 외무성의 사기(士氣)가 가라앉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외교관은 자기가 축적한 지식과 견문을 정부 안팎에 당당히 전달한다. 그것이 프로페셔널 정신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사히신문 대담 기사가 나오기 며칠 전 박 전 수석으로부터 국제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처럼 도쿄를 방문하는데 점심 식사나 함께 하자”는 연락이었는데, 아사히신문 대담을 위해서 도쿄를 방문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대담 기사가 나온 후 긴자에서 식사를 하면서 “주중대사관에서 공사참사관으로 일할 때 만난 아사히신문의 베이징 특파원이 편집국장이 돼 나를 초청했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외교부 안팎에 충격

아사히신문이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주년을 맞아 초청할 정도로 양국관계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던 이가 박 전 수석이었습니다. 그런 박 전 수석이 지난 12일 오전 2시 지병으로 별세한 것은 외교부 안팎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이날 아침 일찍 그와 절친했던 심윤조 전 의원(외교부 차관보, 주오스트리아대사 역임) 으로부터 부고를 들을 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에 따르면 2년 전 발생했던 신우암이 올해 6월 척추뼈 및 간으로 전이되며 치료에 난항을 겪어오다가 갑자기 숨졌습니다. 가족들은 “무엇보다 이겨낼 의지가 강하셨고, 주변에 피해가 안 가도록 묵묵히 치료받으셨으나, 안타깝게도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었기에 주변정리를 마칠 시간이 부족했다”고 했습니다.

2014년 4월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회로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를 방문해 기초공천과 관련한 청와대의 입장을 전달했다. 박 수석이 김·안 공동대표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조선일보

◇화이트리스트 사건 유죄

그의 부고에 놀란 전현직 외교관들이 12일 저녁 속속 상가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모여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조중표 전 국무총리실장, 문하영 전 주체코대사, 박인국 전 주유엔대사, 김재신 한-아세안 센터 사무총장, 이경수 전 주독일대사, 마영삼 전 주덴마크 대사 등이 보였습니다. 저녁 10시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나타났습니다. 그와 가까웠던 조 장관은 문상객들 사이에 앉자마자 “왜 이렇게 말도 없이 일찍 가느냐”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날 상가에 모인 이들은 입을 모아 “누구보다 건강 관리를 잘했던 박준우 대사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 휘말려 재판을 받은 것이 암 발병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수사기관이 박근혜 대통령 주변을 샅샅이 뒤진끝에 재판을 받은 것이 암 발병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얘기였습니다. 12·3 윤석열 대통령의 ‘자폭 계엄’으로 탄핵이 예정된 상황이 8년 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을 연상시켜 더욱 침통한 분위기였습니다.

이같은 얘기가 나온 배경은 그가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영 1km를 하며 건강을 지켜온 그는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보였습니다. 그와 골프를 함께 쳐 본 외교관들은 그의 드라이버 거리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런 박 전 수석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기업들에 보수단체 지원을 강요했다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에 연루돼 2017년 기소됐습니다. 약 3년간 재판을 받은 끝에 2020년 대법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술이 후임인 조윤선 전 정무수석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관측과 관련,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2022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서 사면됐습니다. 그가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이런 말을 제게 한 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재판을 받고 있으면서도 얼굴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런 일에 질 수 없어서 내가 의지로 이겨내고 있다.”

박 전 수석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동정적인 분위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 대담에서도 하코다 논설위원은 “전직 고관인 박 수석도 기소돼 1심으로 집행유예 유죄 판결이 나오고 현재는 항소 중이군요”라며 그가 겪고 있는 고초에 대해 동정심을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 전 수석은 “개인보다 나라가 불행한 일로 유감”이라고 했습니다.

1998년 한일간 미래지향적 선언이 논의될 때 미치가미 히사시 주한일본대사관 참사관(전 한중일 3국협력사무국 사무총장, 현 주불가리아 일본대사)과 함께 한 박준우 외교부 동북아1과장(맨 왼쪽). 맨 오른쪽은 조세영 당시 동북아1과 차석(외교부 국립외교원장, 차관 역임). 1998년 4월 9일 촬영 표시가 오른쪽 하단에 보인다. /미치가미 대사 페이스북

◇‘수처작주’정신...권력과 마찰

박 전 수석을 25년 가까이 지켜봐 온 저는 그가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에 어울리는 외교관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40대 외교부 중간간부 때부터 선배들에게 할 말을 하고 후배들을 이끄는 것을 봐 왔습니다. 수처작주 정신이 그의 명석한 두뇌와 정무감각보다 더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똑 부러지는 스타일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정치 권력과 부딪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무현 정권 때 ‘출세를 위해 외교부를 배신했다’고 평가받는 모 인사에 대해선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반(半) 공개적으로 하고 다녔습니다. 노무현 정부에 밉보여 2002년 초부터 2년 가까이 심의관 문패가 걸린 방에서 지내다가 2004년 반기문 장관 체제에서 아시아태평양국장이 됐습니다.

반기문 장관 특보에 이어서 주싱가포르 대사로 나가 있을 때 송민순 장관이 취임하면서 부임한지 1년도 채 안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송 장관이 평소 신임하던 그에게 외교부 인사, 재정을 총괄하는 기획관리실장을 맡겼습니다. 그후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정부가 인사에 관여하려 하자 강하게 맞섰습니다. 이 때문에 주EU 대사로 나갔다가 차관에 내정됐으나 취소돼 임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가장 유력한 주일대사 후보로 꼽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박 전 수석은 1978년 처음으로 50명을 뽑은 외무고시 12기 동기 중에서 입부 직후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여러가지 기록을 세워왔습니다. 1984년 그의 첫 부임지는 주미대사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교관이 첫 임지로 워싱턴 DC에 가는 것은 큰 영예입니다.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어떤 ‘빽’이 있더라도 불가능합니다.

1987년 미국에서 돌아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실의 외교 담당 행정관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외교안보수석이 없을 때로 민주화 이후 전환기의 한미관계에 대해 많은 보고서를 썼습니다.

1990년 청와대를 나올 때 그는 미국으로 연수를 가기로 돼 있었습니다. 주미 대사관에 함께 근무했던 송민순 서기관(나중에 국가안보실장, 외교부 장관 역임)의 도움으로 버클리대에 유학갈 예정이었으나, 외교부 일본통 선배들의 제안으로 게이오대에서 연수를 했습니다. 그는 제게 “게이오대에서 2년동안 책 80권을 읽으며 일본을 공부하고 일본어를 익혔다. 정말 열심히 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그가 게이오대 연수를 마치고 주핀란드 대사관에 부임, 2년을 근무했을 때 주일대사관의 심윤조 정무과장이 귀국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공노명 주일대사가 임성준 청와대 외교비서관(외교안보수석,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역임)에게 “심 과장 후임을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임 비서관이 박준우를 추천, 그는 헬싱키에서 곧장 도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외교부 동북아 1과에 단 하루도 근무하지 않은 채 주일대사관 정무과장이 됐습니다. 정무과장을 마치고 다시 청와대를 거쳐 동북아 1과장에 임명되자 외교부 안팎에 그를 주목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어서 그는 주중대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주미 대사관에서 정무과 서기관, 주일 대사관에서 정무과장, 주중 대사관에서 정무 참사관을 하는 기록을 세운 겁니다.

◇ 오구라 주한일본대사가 주목

그가 외교부에서 활약하는 것을 눈 여겨 본 이가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주한일본대사였습니다. 오구라 대사는 당시 과장에 불과하던 그에게 와인을 선물하고, 여러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습니다.

박 전 수석은 제게 “미래를 지향하는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쉽 아이디어는 사실 오구라 대사에게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오구라 대사가 1999년 한일 FTA를 하자는 메모를 나에게 줘서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박 전 수석의 유품에서 오구라 대사와 관련된 기록이나 메모가 나온다면, 새로운 사실이 발굴될 수 있을 듯합니다.

2006년 반기문 외교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에 박 전 수석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반 장관이 유엔 총회의장 비서실장을 하면서 유엔 내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에 주목해 장관 특보로 이와 관련된 여론을 청와대에 알리는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7일 전화통화에서 “박준우 대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맡겨도 문제없이 처리해내는 역량이 뛰어났다. 내가 해외에 나와 있는 사이에 그가 갑자기 숨졌다는 연락을 받아 크게 놀랐다. 부부동반으로 자주 만나왔는데 그가 일찍 떠나 참으로 슬프다”고 했습니다.

P.S.

1. 박준우 전 수석에 대해 신상목 전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현 일식당 기리야마본진 대표)이 2022년 이런 평을 페이스북에 남긴 바 있습니다.

“한일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한일) 양쪽이 다 기본 토대로 삼은 것이 김대중-오부치의 한일 파트너쉽 선언이다. 사람들은 정상(선언)만 기억하지만 그 선언이 나오기까지 실무에서 지난한 산통을 겪었다.

이를테면 그 선언에는 한국어에 일본의 ‘사죄’ 표현이 있다. 일본에서 お詫び의 번역은 ‘사과’로 해야 한다고 막판까지 버텼지만 결국 뚝심있게 밀어붙여 관철시킨 스토리 등 막후에 살 떨리는 얘기들이 많다.

그 실무 라인이 박준우-사사에 채널이다. 외교부에서 선굵은 정책과 실행력으로 일찍부터 에이스로 정평이 난 박준우 대사(일반인에게는 박근혜 시절 정무수석으로 기억되겠지만)같은 분이 주일대사로 부임하면 줄건 주고 받을건 받으며 말 그대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주미대사나 주중대사는 별로 활약의 여지가 크지 않지만 주일대사는 역량과 퍼포먼스에 따라 포지션을 스스로 넓혀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직접 모시기도 했지만.. 아 머리 좋은 사람은 참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