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연초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문장력을 겸비한 소신 발언이 외교부 안팎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조 장관은 지난해 12·3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12·14 윤 대통령 탄핵 이후 불안정한 정국에서 자신이 직접 준비한 연설문과 기자회견 발언을 통해 극도로 불안정한 국제정세에도 불구, 당파 싸움을 일삼는 여야 정치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각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7일 한국외교협회 신년회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신봉길 외교협회장, 조태열 외교부 장관, 김숙 전 주유엔대사, 이태식 전 주미대사./외교협회

◇ “혼돈의 시기, 힘들게 견디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프레스센터 18층에서 한국외교협회(회장 신봉길) 신년회가 열렸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윤영관·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이시영 전 외교부 차관, 박수길·권병현·이재춘·나종일 대사를 포함, 200여 명의 전현직 외교관들이 참석했습니다.

조태열 장관은 이날 신년사에서 지난해 12월 계엄 이후 현 정국에 대해서 솔직한 심경과 비장한 각오를 밝혔습니다. 조 장관은 먼저 “무엇보다도 지난 한달간 있었던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해 외교부 장관으로서, 그리고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며 특히 여러 선배님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자책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 혼돈의 시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만 짐이 너무 무겁고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고 했습니다. 조 장관은 이 말을 한 후 울컥한 듯, 약 10초 정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살짝 눈물을 흘린 듯했습니다. 그는 “모든 혼돈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새 질서를 찾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해야 할 책무를 다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 여야 각성 요구하며 작심 발언

조 장관은 특히 국무위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여야 정치권을 향해 비판적 발언을 하며 외교안보문제에서만큼은 비상하게 대응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전례없는 지정학적 대(大) 격동기에 기민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 외교는 미증유의 국내 정치적 갈등 상황으로 인해 손발이 묶여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윤 대통령 탄핵 이후, 여야가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해 ‘내전’ 중인 상황을 지적한 겁니다.

그는 지금은 “위기를 절대로 낭비하지 말라(Never let a crisis go to waste)는 처칠의 명언을 기억해야 할 때” 라며 “외교 정책의 진폭을 줄이고 일관된 비전과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 장관은 여야가 외교만큼은 초당적으로 임해줄 것을 요청하며 미국의 사례를 거론했습니다.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루즈벨트-트루먼 대통령을 도와 2차 대전 수행을 지원하고, 냉전 초기 대소 전략에 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아서 반덴버그는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새해에는 대한민국 외교가 진영 논리의 강을 건너 거센 파도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정치권이 깊은 성찰을 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는 외교협회 연설 하루 전에는 정치권의 각성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6일 방한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기자회견에서 “우리 정치권이 각성하면서 더 나은, 더 완벽한 민주주의를 향해 노력해야 하고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극복하고 화합과 통합과 치유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 겁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를 바꾸기 위한 지지층의 각성도 필요하다”고도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역대 외교부 장관 중 어느 누구도 정치권을 향해 이같이 직설적으로 당파 싸움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외교의) 손발이 묶였다’ ‘진영 논리의 강을 건너자’며 ‘정치권의 깊은 성찰과 각성’을 촉구한 이는 아마도 조 장관이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조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재취임을 앞둔 최근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조지훈 선생 아들...”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외교를 ‘말과 글로 하는 국가행위’로 정의하는 조 장관은 ‘지조론(志操論)’으로 유명한 조지훈 전 고려대 교수의 막내아들입니다. 지훈 선생은 “지조란 것은 순일 (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라고 했는데, 조 장관은 늘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조 장관이 2020년 6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떨 때는 채찍질이나 세속적 의미로는 족쇄다, 족쇄. 조직사회라는 게 끈, 연줄, 압력, 청탁이 동원되는데 연줄 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내가 근무하던 외교부는 1년에 몇 번씩 인사가 있기에 그때마다 외부에서 그런 반칙 행위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하하하) 자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잘못 처신해서 아버지 명성에 누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고위직에 올라 여러 언론과 만나면 늘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스트레스였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누구 자식이 저 모양이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외교부 간부들은 조 장관이 혼돈의 정국에서 소신 발언을 하는 배경에 아버지의 기질이 엿보인다고 말합니다.

◇ “조지훈 선생 아들인 내게 환상 같은 기대”

조 장관은 젊은 시절부터 연설문, 보고서 잘 쓰기로 손꼽히는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2021년 펴낸 ‘자존과 원칙의 힘’이라는 책에서 “지금까지 연설이든 기고문이든 대외에 공개되는 글을 직원들이 써 준대로 읽거나 발표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메시지가 제대로 담겨 있지 않을 경우에는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다듬어 마무리하곤 했다”고 합니다.

1979년 제1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가 문필력을 인정받은 계기는 전두환 대통령의 1984년 국빈 방일 당시 연설문 초안을 쓰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전대통령에 대해 “일본을 공식방문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원수가 하필이면 정통성 시비를 겪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내심 불만스러웠고 그것 또한 한일 양국의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어린 시절 아버지 조지훈 선생, 어머니 김난희 여사, 누나 혜경씨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월간조선

그는 “아버지가 이름난 문인(청록파 시인 조지훈)이라고 해서 아들도 글을 잘 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모두들 내게 일종의 환상 같은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전 대통령 국빈 방일에서 중요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 주최 만찬 답사였는데, 이를 위해 그는 서점에서 한일 관계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다룬 책, 양국의 속담집을 몇 권 사서 호텔에서 책만 읽으며 몇 주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글을 쓸 때면 지금도 늘 겪는 고통이지만 백지를 앞에 두면 이걸 어떻게 채워 나갈지 막막해진다. 어두운 과거와 밝은 미래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니 그 막막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는 고심 끝에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을 핵심 메시지로 한 초안을 마련했습니다. 권병현 아주국 심의관( 주중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역임)이 이에 가필하여 청와대로 올렸습니다. 최종적으로 그가 제안한 이 속담을 키워드로 한 연설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The ground hardens after a rainfall 로 번역됐는데, 전 대통령의 방일 당시 TIME지 기사 제목으로 인용됐습니다.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후, 그는 대통령 해외 방문 계획 때마다 차출됐습니다. 그는 “글을 못쓴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것은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상사들의 높아진 기대 수준에 나를 꿰어 맞추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주한 미대사와 통화 회피로 비판받아

유려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여야 정치권에 대해 소신발언을 하는 조 장관이지만, 그의 처신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윤 대통령이 12월 3일 긴급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계엄 선포 계획을 밝히자 최상목 부총리와 함께 강하게 반대한 국무위원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국제 사회의 안보 및 경제 동향을 잘 알고 있기에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막지 못했습니다.

조 장관이 국제사회가, 특히 동맹국인 미국이 헌법을 위반하는 계엄 발동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거론해 저지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계엄 후 입장 발표에서 여러 국내적 상황을 거론하며 변명했으나 이 사태가 한미동맹과 대외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계엄령 발동 당시 이에 대해선 아무런 고려가 없었다는 방증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 조 장관의 당시 역할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가 계엄 직후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대사의 통화 요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한 외교관은 “그런 상황에서는 신속하게 골드버그 대사와 통화해야 했다. 크게 의미있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중요한 외교 행위다. 그랬다면 골드버그 대사가 국무부 본부로부터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주재국 외교부 장관과 통화도 못했다’는 질책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전직 외교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 장관이 자칫 미국에 잘못된 정보를 줄까 봐 통화를 피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조 장관의 그런 행동이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을 무시하는 듯한 메시지를 사태 초기에 발신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