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17개 시도 선거관리위원회 간부들이 지난 20일 김세환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을 만나 차기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에 친여(親與) 논란이 있는 인사를 임명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이들은 대통령이 임명한 비상임 선관위원 2명(이승택·정은숙)을 호선(互選) 방식으로 상임위원에 임명할 경우 “회의장 앞에서 피켓 시위에 나서겠다”는 뜻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사무총장은 17개 시도 선관위 간부들의 이런 입장을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대법관)과 조해주 전 상임위원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한 시(市) 선관위 관계자는 “문재인 대선 캠프 특보 출신으로 임명될 때부터 논란이 됐던 조해주 전 상임위원 사례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 후임 상임위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문상부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이 23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 몫으로 중앙선관위 위원으로 추천됐던 문상부(65)씨는 조 전 위원이 임기를 더 이어가려다 선관위 직원들의 집단 항의에 부딪혀 지난 21일 사퇴한 데 대해 “조 위원 재임 시절 선관위가 각종 논란에 휘말려 불공정 집단으로 전락하면서 쌓인 직원들의 불만과 울분이 폭발한 것”이라고 본지 인터뷰에서 밝혔다.

문씨는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을 거쳐 상임위원을 지내다 지난 2018년 12월 퇴임했다. 국민의힘이 야당 몫 선관위원으로 추천해 국회 인사청문회까지 마쳤으나 더불어민주당이 본회의 상정을 반대해 임명안이 처리되지 못했다. 그러다 조 전 위원이 선관위 직원 집단 반발로 지난 21일 결국 사퇴하자 “후배들 덕에 선관위가 다시 살아났다”며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문상부씨는 본지 인터뷰에서 “조해주 전 상임위원이 임명된 이후 4·15 총선 부정선거 의혹, 4·7 재·보궐선거 현수막 문구 표현 논란 등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며 “선관위가 아무리 해명해도 편향성 시비가 이어져 속앓이를 하는 선관위 직원들이 많았다”고 했다. 문씨는 선관위 1급 간부부터 9급 직원까지 조 전 위원 사퇴 요구에 합세한 이번 사태에 대해 “공무원 중에서도 정치 중립에 누구보다 예민한 선관위 공무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전례가 없는 사건”이라며 “선관위 직원들 사이에서 ‘이대로 가다간 이번 대선도 불공정 논란에 휘말릴 것’이라는 우려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문씨는 조 전 위원 전임 상임위원을 지냈다. 상임위원(장관급)은 총 9명인 중앙 선관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선관위에 상근하며 선거 관리 업무를 총괄한다. 문씨는 “청와대와 여야(與野)가 뜻만 모으면 조 전 위원 후임으로 중립적인 인물을 찾아 임명할 수 있다”면서 “만약 현 여권 세력이 조 전 위원 후임에도 친여(親與) 인사를 임명하려 한다면 ‘제2의 조해주 사태’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문씨는 중앙선관위와 전국 17개 시도 선관위 공무원들이 조 전 위원 사퇴 촉구에 나선 것은 “후임 상임위원에는 정치적 편파 시비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통령 임명으로 비상임 선관위원이 된 이승택·정은숙 위원 중 1명을 호선(互選) 형식을 빌려 상임위원으로 이동시킬 경우 국회 인사청문회를 건너뛸 수 있다. 그럴 경우 ‘꼼수’라는 지적과 함께 또다시 불공정 시비가 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직 중앙선관위 선관위원들도 최근 중립적인 인사를 차기 상임위원에 앉혀야 한다는 뜻을 담은 입장문을 노정희 중앙선관위원장에게 전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씨는 “선관위를 둘러싼 정치 편향 시비를 막기 위해 지금이라도 선관위는 중앙선관위원 회의록을 전면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곰팡이는 햇볕을 쬐어주면 사라지기 마련”이라면서 “정치 편향성을 의심받는 선관위원들도 회의록이 공개되면 편파 시비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선관위는 조해주 전 위원이 재임한 지난 3년간 각종 선거 때마다 정치 편향 시비에 휘말렸다. 선관위는 지난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민주당을 연상시키는 파란색의 택시 래핑 광고를 제작하고, ‘보궐선거 왜 하죠?’ ‘내로남불’ 같은 문구는 못 쓰게 해 여당 편향 논란을 불렀다. 2020년 4·15 총선 전에는 ‘비례자유한국당’ 명칭을 불허해 논란을 키웠다.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이름과 유사하다는 것이 불허 이유였다. 당시 상임위원이던 조 전 위원은 당명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중앙선관위원회 전체 회의를 하루 앞두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정당법에 창당을 준비하는 정당 명칭은 기존 정당 명칭과 뚜렷하게 구별돼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고 밝혀 “사전 지침을 내린 것”이란 야당 반발을 불렀다. 야당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위원회 회의록을 요구했지만 선관위는 거부했다. 문 전 위원은 “선관위 신뢰성을 지금보다 더 떨어트려선 안 된다”면서 “친여 인사를 상임위원에 앉힐 바에는 차라리 상임위원을 공석으로 두고 대선과 지방선거를 치르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