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사진 왼쪽)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 후보는 지난 25일 제2차 법정 TV토론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6개월 초보 대통령'이라 표현하며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고 했다. /조선일보DB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와 여권(與圈) 인사들은 수도 키예프에서 항전 중인 것으로 알려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4·Volodymyr Zelenskyy)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두고 “무능하고 아마추어 같다” “러시아를 자극했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일제 강점의 빌미를 제공한 구한말 조선왕조의 지도자’쯤으로 비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문제의 초점을 ‘러시아의 일방적 주권 침탈 시도와 유엔(UN) 헌장·국제법 위반’이 아니라, 젤렌스키 대통령의 배경(코미디언 출신)과 ‘무능력함’에 맞추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같은 기류는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의 정치 리더십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국민을 향해 연대의 뜻을 보내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검사 출신으로 외교·행정 경험이 없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 아래, 여권이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짚기보다 정쟁화에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권의 이런 행태를 놓고 국내외에서 비판이 계속되자 이 후보는 26일 밤늦게 “제 표현력이 부족했다.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안녕을 지지한다”며 사실상 사과했다.


◇ 젤렌스키 탓하는 與의 삐뚤어진 시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가 지난 25일 중앙선관위과 주재한 제2차 법정 TV토론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와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판하는 여권 인사들의 사고 구조·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외교·행정 경험이 일천한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기성 정치를 혐오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어쩌다 당선됐다. 불필요하게 러시아를 자극했고 결국 전쟁이 발발해 국민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 평생을 검사로만 일한 윤석열 후보를 뽑으면 똑같은 파국을 맞이할 수 있다.” 지지자들도 이 같은 취지를 담은 게시물을 만들어 돌리고 있다.

여권 인사들의 말처럼 1978년생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코미디언 출신이다. 그가 40대 초반의 나이에 인구 4400만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과정 자체가 드라마였다. 젤렌스키는 2015년부터 방영된 인기 TV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대통령 역을 연기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과 염증에 기대 돌풍을 일으키며 일약 대통령까지 오르는 ‘신화’를 썼다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2019년 5월 취임한지 3년도 되지 않아 조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됐다.

이 후보는 지난 25일 중앙선관위가 주관한 제2차 법정 TV 토론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6개월 초보 정치인”이라고 표현하며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가입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이 일방적 침공을 저지른 러시아나 침공을 결정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보다 ‘무리한 나토 가입 요구 등으로 원인을 제공한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26일 파주 유세에서도 “우크라이나 사태로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방송토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도자만 무지하지 않으면 그런 걱정 전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이 후보 발언은 영미권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인 ‘레딧’ 등에 빠르게 퍼지고 있어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켈리 부산대 부교수는 트위터에서 이 후보 발언에 대해 “(이 후보) 의견은 경험적으로 부정확하고 수치스럽다(shameful)”이라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한국을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은 이 후보의 발언을 소개했고, 해외 논객과 연구자들은 이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각자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 與 “지도력 부족·경험 없는 코미디언 출신” 십자포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25일 KBC광주방송에 출연해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박 의원은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에 대한 규탄 없이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해서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다"고 했다. /유튜브 캡처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젤렌스키 탓이다’ ‘우크라이나 외교도 문제 있다’는 식의 논리는 이 후보 말고도 다수 여권 인사들의 저변에 깔려 있다.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인 박용진 의원(서울 강북구을)은 25일 KBC광주방송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 “잠깐 인기 얻어 갑자기 대통령이 된 코미디 배우 출신”이라며 “지금은 서방 지도자 회의에 초대받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다”고 했다. 반문(反文) 정서에 힘입어 대통령 후보까지 오른 윤 후보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박 의원 인터뷰에서 일방적 침공을 결정해 주권 강탈을 시도한 러시아나 푸틴 대통령을 규탄하는 메시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도 페이스북에서 젤렌스키를 향해 “지도력이 부족하고 외교 경험이 없는 코메디안 출신”이라며 “미숙한 리더십으로 러시아를 자극하고 감당하지 못할 위기를 자초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유세에서도 “대통령을 잘못 뽑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라고 했다. 이재명 후보 직속 평화번영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남 무소속 김홍걸 의원(비례)은 트위터에서 “국가 위기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다 숨어버린 대통령” “정치 혐오 정서에 휩쓸려 아마추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선대위 평화번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소속 김홍걸 의원이 지난 25일 트위터에서 위와 같이 발언했다. /트위터

선대위 미디어특보단장인 최민희 전 의원은 “푸틴을 규탄한다”면서도 “푸틴 침략은 일제 침략과 같다. 구한말 무능 부패한 왕과 조정이 일제 침략을 못 막았듯 준비 안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이 희생되고 있다”고 했다. 젤렌스키를 조선 말 고종이나 순종쯤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외에도 여당 의원 출신인 박범계 법무장관이 트위터에서 ‘러 침공 예측 못하고 위기 키운 아마추어 대통령’이란 제목의 기사를 공유했고,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은 페이스북 댓글로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이 오히려 주요인”이라고 했다.


◇ 尹 때리려 젤렌스키를 ‘희생양’ 삼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사진 오른쪽)가 24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긴급 안보경제 연석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송영길 대표. /국회사진기자단

이 후보를 비롯한 여권 인사들이 이번 일에 대해 적극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유권자들의 표심에 영향을 끼칠 거대 변수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지난 25일 TV 토론을 비롯해 여야 후보의 유세장에서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언론의 헤드라인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많이 본 게시물’ 게시판 등을 도배하며 대선을 열흘 앞둔 지금 유권자들이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주제기도 하다. 한 국책 싱크탱크 관계자는 “결이 다르지만 북한의 핵·미사일을 머리에 이고 사는 한반도의 현실이 겹쳐보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외교·안보와 국방,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보수와 진보의 철학과 시각이 명확하게 갈리고 있다. 이 후보는 “싸워서 이기는 것은 하책(下策)” “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경제다” “비싼 평화가 낫지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북한 비핵화 문제 등과 관련해 ‘평화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윤 후보는 “평화는 결국 강력한 동맹, 힘과 균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나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 편입 같이 논쟁적이고 찬반이 갈리는 옵션일지라도 대북 억지력 구축을 위해서라면 도입해볼만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의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이 후보를 비롯한 여권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윤 후보의 외교·안보 미숙함을 드러내는 소재로 활용하는데 화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무능한 지도자의 표본’으로 삼으며 희생양 삼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 美·EU는 연대의 뜻… 젤렌스키는 정말 무능한가

독일 베를린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에 대한 연대의 뜻을 담은 조명이 비쳐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여권의 이런 기류와 달리 서방 국가들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소통하며 연대의 뜻을 밝히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각) 백악관 페이스북을 통해 NATO 정상회의 뒤 젤렌스키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을 밝히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용감한 행동을 높게 여긴다”고 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등 대(對)러시아 제재 수위를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EU 정상들도 젤렌스키와의 통화에선 한마음 한뜻으로 연대와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다. 파리의 에펠탑,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에는 연대의 뜻을 담은 우크라이나 국기 조명이 비쳐졌다.

이 후보가 젤렌스키 대통령과 관련해 ‘무리하게 나토 가입을 추진해 러시아를 자극했다’고 표현한 부분을 놓고도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토 가입을 강력하게 주창한 것은 맞지만, 이미 그가 취임하기 전인 2019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에선 나토 가입을 명시한 개헌안이 압도적인 찬성 속에 통과됐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합병, 돈바스 사태 등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체감한 유권자들의 요구에 의회가 부응한 것이다. 또 젤렌스키는 지난 2020년 7월까지 푸틴과 전화 통화를 하며 소통했다. 대중의 요구에 영합한 ‘외교 포퓰리즘’이 아니라 러시아와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는 외교가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토 가입으로 대표되는 우크라이나의 ‘서방으로의 편입’ 열망은 200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이른바 ‘오렌지 혁명’으로 친(親)서방 정권이 들어선 뒤 빅토르 유시첸코 전 대통령 등이 나토 가입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전직 외교부 차관급 인사는 “우크라이나 외교의 역사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줄타기였다”며 “20년 넘게 논쟁적이었던 사안의 책임을 오롯이 ‘3년차 대통령의 무능함’으로 몰고 가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고 했다. 우크라이나 만의 역사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군복을 입고 전선을 둘러보고 있다. 그는 트위터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나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하고 있다. /트위터

여기에 여권이 “아마추어 대통령”이라고 비하한 젤렌스키는 “국민들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하겠다”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탈출·망명 권유를 거절했다. 젤렌스키는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주기적으로 공개하며 “나는 키예프를 떠나지 않고 당신들과 함께 있다”는 메시지를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소셜미디어(SNS)에선 그가 전쟁 발발뒤 보인 행동을 놓고 “정치인을 뽑으면 코미디언을 얻지만, 코미디언을 뽑으면 우리는 지도자를 얻게 된다”는 문구가 명언처럼 회자되고 있다. 2019년 대통령 후보 시절 그가 ‘한국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민주국가인 한국은 이웃에 독재국가(북한)가 있음에도 어떤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말한 화면도 급속도로 돌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적은 메시지는 이랬다. “나는 죽더라도 여기서 우리의 군인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세계는 우리 편이고 진실도 우리편이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