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여당의 참패로 끝난 총선 결과와 관련해 “더 낮은 자세와 유연한 태도로 보다 많이 소통하고 저부터 민심을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모두 발언은 TV로 생중계됐다. 총선 후 6일 만에 윤 대통령 육성으로 나온 공식 입장 표명이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지난 2년 동안 국민만 바라보며 국익을 위한 길을 걸어왔지만,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이번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후 비공개로 전환된 국무회의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대통령인 저부터 잘못했다. 국민의 뜻을 잘 살피고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기자들과 만나 전했다. 공개 발언 때는 없었지만 비공개 회의 때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또 “선거 결과는 한편으로는 당의 선거운동을 평가받는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 국정 운영을 평가받는 것”이라며 “매서운 평가를 받은 것이라 받아들인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무위원과 참모들에게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사랑의 회초리’에 비유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자식이) 매를 맞으면서 무엇을 잘못했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지 반성한다면 어머니가 주시는 ‘사랑의 회초리’ 의미가 더 커질 것”이라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얼마나 어떻게 잘할지가 우리가 국민으로부터 회초리를 맞으며 생각해야 하는 점”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개혁 과제는 지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과 의료 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은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구조 개혁은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회와의 협조를 강조하면서도 야당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책임을 다하면서 국회와도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것”이라며 “민생 안정을 위해 필요한 예산과 법안은 국회에 더 잘 설명하고 더 많이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 공개 발언을 12분간 하면서 그중 약 9분간 총선과 관련한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특히 거시적으로 ‘국정의 방향’은 제대로 설정했지만, 이러한 국정 성과가 미시적으로 민생과 직결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했다. 방향은 옳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부족했다는 취지였다.
윤 대통령은 “올바른 국정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 세심한 영역에서 부족했다”고 했다. 또 “물가 관리에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어려운 서민 형편을 개선하는 데 미처 힘이 닿지 못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국정 과제로 중점 추진했던 원전 생태계 복원 등도 언급하며 “회생의 활력이 중소기업, 소상공인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데는 미흡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들께서 실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국정의 방향은 옳지만, 운영하는 스타일과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가 절대다수 의견인 것 같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포퓰리즘 정책에 대해선 “나라의 미래를 망친다. 전체주의와 상통한다.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경계하면서도, 서민의 어려움을 챙기는 부분을 우선순위에 두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 공개 발언 중 ‘민생’이라는 단어는 11차례 등장했다. 윤 대통령은 올 들어 전국을 돌며 개최했던 민생 토론회를 총선 후에도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소통’을 두 차례 언급했다. 총선 후 대통령의 첫 입장 표명을 두고 대국민 담화나 기자회견 이야기도 나왔지만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택했다. 국민의힘에서도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지만, 대통령실은 별도 회견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이날 브리핑을 열어 비공개 국무회의 때 있었던 윤 대통령의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발언을 추가로 공개한 것을 두고는 지난 1일 의사 증원 관련 대국민 담화 때와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윤 대통령은 51분 담화의 상당 부분을 의사 2000명 증원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는데, 이후 성태윤 정책실장 등이 방송 등에 출연해 “2000명 숫자가 절대적 수치란 입장은 아니다”라고 추가 설명에 나섰다. 여권 관계자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대통령과 참모진 간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요구하는 양자 회담에 대해 “윤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뭐가 있느냐’고 했는데 그 안에 답이 포함돼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다만 “(22대) 국회는 5월 말 새롭게 열린다”며 “어떤 시점이 국회와 소통하기 적절한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또 총선 직후 사의를 밝힌 한덕수 국무총리와 대통령실 이관섭 비서실장 등 인적 개편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회의 임명 동의가 필요한 후임 총리 인선은 좀 더 시간을 갖고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애초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던 비서실장 인선도 다소 늦어지는 분위기다. 윤 대통령은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유력 검토했지만, 최근 후보군을 넓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진석 의원, 이정현 전 의원 등도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원 전 장관의 비서실장 기용을 두고는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지만 대야(對野) 관계가 변수가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원 전 장관은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인천 계양을에서 맞대결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관섭 현 비서실장을 당분간 유임하는 방안도 일부에서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