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압록강 하구가 내다보이는 평안북도 철산군 앞바다의 섬 ‘수운도(순도)’에서 국군 여성 첩보부대원 도종순씨가 중공군의 기습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6·25전쟁 정전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도씨가 전사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나 도씨는 이미 2년 넘게 적진을 넘나들며 첩보 수집 활동을 한 베테랑이었다. 1932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목수 가족의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도씨는 19세인 1951년 2월 같은 동사무소에 근무하던 또래 2명과 함께 첩보 부대에 자원했다. 셋 중에서 선발된 것은 도씨뿐이었다. 몇 달 뒤 도씨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묻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하루 만에 다시 집을 떠났다. 그것이 가족들이 본 도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도씨의 활동이 알려진 것은 막냇동생 도용영(74)씨가 아버지에게 뒤늦게 도씨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후였다. 도용영씨는 국군 정보사령부에 누이의 복무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정보사는 도씨가 1951년 2월부터 11월까지 대북 첩보 부대인 4863부대에서 복무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도씨의 동료인 다른 여성 대원은 도씨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과 함께 평북 철산군 일대에 투입돼, 국군 유격대와 연락하면서 적의 동태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증언했다. 치열한 교전으로 대원 다수가 전사했고, 도씨와 연락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만 먼저 철수했다고 한다. 정보사는 이를 바탕으로 2008년 도용영씨에게 ‘도씨가 특수 임무 수행 중 1951년 말 전사했다’는 전사 확인서를 보냈다.
그러나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도씨가 미군 소속인 것 같다고 판단했다. 지원단은 동료 대원들이 미군 첩보 부대로 파견됐다가 복귀한 뒤 해고된 기록이 확인된다며, 도씨도 미군으로 소속이 바뀐 뒤 전사했다는 것이다. 정보사는 2012년 재조사를 통해 도씨가 미군 첩보 부대에 구출된 뒤 미군 극동사령부 직할 첩보 부대 중 하나인 ‘호염부대’에서 근무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 때문에 도씨는 국군 전사자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정보사는 도씨가 국군 소속임을 전제로 발급한 전사 확인서를 유족들에게 회수하려 했고, 대전현충원과 정보사 충혼탑에 새겨져 있었던 도씨 이름은 ‘삭제’ 처리됐다. 도용영씨는 “충혼탑에 가서 보니 누이 이름에 검은색 테이프가 덧붙여져 있었다”고 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유족들의 민원을 받아 사건을 다시 검토했다. 권익위는 국군에서 도씨를 미군으로 전속시킨다는 명령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미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고 볼 구체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권익위는 정보사에 도씨가 국군 소속이었으며 미군에 단지 파견됐을 뿐인 상태에서 전사한 것은 아닌지를 다시 심사하라는 의견을 냈다. 정보사는 조만간 심사를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
김태규 권익위 부위원장은 “도씨는 미군 첩보 부대와 함께 더 많은 전과를 올린 셈이고, 당연히 종전보다 예우가 좋아져야 한다”며 “그런데도 규정을 예리하게 적용해 전사 당시 소속을 따져 불이익을 주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