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시·군·구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청탁금지법을 어기고 금품을 받아 온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일부 직원들은 부정하게 받은 돈으로 ‘공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행태를 제지해야 할 중앙선관위는 오히려 청탁금지법을 멋대로 해석해 ‘금품을 제한 없이 받아도 법 위반이 아니다’라며 사실이 아닌 내용을 여러 차례 내부 공지했다. 중앙선관위가 무보수여야 할 비상임 위원들에게 법적 근거도 없이 매달 수백만원을 지급하다가 적발되자, 이를 중단하기는커녕 기획재정부를 속이고 관련 예산을 계속 타내 온 정황도 드러났다. 자녀 특혜 채용 의혹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선관위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감사원이 10일 공개한 선관위 정기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까지 6년간 전국 249개 시·군·구 선관위 직원 1925명 가운데 128명(6.6%)이 청탁금지법을 어기고 금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시·군·구 선관위는 비상임인 선관위원들이 회의에 참석하면 위원 1인당 6만원의 회의 참석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35개 선관위는 이 수당을 각 위원들에게 지급하는 대신, ‘총무’ 역할을 맡은 위원 1명에게 쥐어주고, ‘부서비’처럼 쌓아두게 했다. 그러고는 사무국장 등 선관위 직원들이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는 데 썼다.
한 직원은 지난해 7월 1일부터 2박3일간 제주도로 골프 여행을 가면서 그 경비 140만원을 선관위원 수당에서 충당했다. 다른 직원들도 일본 도쿄·오사카, 필리핀 보라카이, 베트남 호찌민·다낭, 태국 방콕 등으로 공짜 여행을 가는 데 선관위원 수당을 받아 썼다. 이렇게 선관위원 수당으로 공짜 여행을 다녀온 직원들만 20명에 달했다. 118명은 ‘회식비’ ‘간식비’ ‘명절 격려금’ ‘전별금’ 등의 명목으로 수십만원을 받았다. ‘건강 쾌유’를 명목으로 20만원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선관위 직원들이 명목상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선관위원들 앞으로 나온 수당을 제 돈처럼 마음대로 쓴 것에 대해, 감사원은 지방 선관위원들이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관위 직원들의 감독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시·군·구 선관위의 위원 9명 중 3명은 각 정당이 추천한 인사로 임명되는데, 그러다보니 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선관위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나중에 출마했을 때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선관위원 재직 시절에 돈을 써서 선관위 직원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선관위 직원들의 금품 수수는 청탁금지법 위반으로서 과태료 등 처벌 대상이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선관위 내부 게시판에 ‘선관위원이 소속 사무처 직원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경우 금액 제한 없이 가능하다’는 글을 여러 차례 올리면서 지방 선관위 직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청탁금지법에 따르면 상급 공직자가 하급 공직자에게 위로·격려·포상 등의 목적으로 금품을 주는 것은 허용되는데, 지방 선관위 위원들이 직원들에게 금품을 주는 것은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원이 확인해 보니, 지방 선관위원 대다수는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는 비상임 명예직 위원들이어서 공직자에 해당하지 않았다. 또 국내·외 여행 등은 공무 수행과도 관계가 없었다. 애초에 청탁금지법상 면책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중앙선관위는 청탁금지법 유권해석 기관인 국민권익위원회에 문의해보지도 않고 ‘청탁금지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임의로 해석해 공지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선관위 위원과 직원들이 금품을 주고받는 관행에 대해, “선관위원이 선거일 90일 전에 위원직을 사퇴하고 곧바로 선거에 출마해 해당 선관위 사무처의 직접적인 지도·관리 대상이 되는 사례, 선관위원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등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하는 사례 등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관위원과 사무처 직원 간 관계에서 부정 청탁, 공정성 훼손 등의 개연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앙선관위에서는 위원장과 위원들이 부당하게 수당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선관위법에 따르면 중앙선관위 위원 9명 중 위원장을 포함한 8명은 비상임이어서 보수를 받을 수 없고, 회의 참석 등에 들어간 실비만 보상받을 수 있다. 회의에 출석하거나 선거 사무를 본 날에 한해 하루에 10만원이 지급된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공명선거 추진 활동 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매달 위원장에게는 290만원, 비상임 위원에게는 215만원을 지급했다. 감사원은 2019년 감사에서 이런 수당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중앙선관위에 수당 지급을 중단하라고 통보했다. 국회도 수당 지급이 위법이라는 지적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매년 기재부에 예산을 신청하면서 ‘감사원 등 외부 기관으로부터 아무 지적을 받지 않았다’고 거짓으로 적어 제출했고, 이 때문에 기재부는 비상임 위원들에게 수당을 주는 예산을 편성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매년 예산을 편성해줬다. 이런 식으로 중앙선관위는 2019년 감사원 감사 이후 지난해까지 예산 6억5000여만 원을 부당하게 타내 위원들에게 줬다. 권순일·노정희·노태악 등 전·현직 위원장들도 이 수당을 받아갔다.
중앙선관위가 진행한 경력직 채용에서도 다수의 ‘실수’가 발견됐다. 중앙선관위가 2019~2022년 4년간 진행한 23회의 경력직 채용 서류 전형에서, 응시자들의 경력에 점수를 잘못 부여한 경우가 57건에 달했다. 일부 응시자는 받았어야 할 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고, 다른 일부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 때문에 3명은 당락이 바뀌기까지 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채용 중간 단계 당락만 바뀌었을 뿐 최종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사 비리가 있었는지를 따로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응시자들은 중앙선관위의 잘못으로 면접을 볼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은 청탁금지법을 위반한 선관위 직원 128명을 법원으로 넘겨 과태료 처분을 받게 하고, 선관위원들로부터 금품을 받는 것이 청탁금지법 위반이 아니라고 거짓으로 공지를 한 직원 1명에 대해서는 주의를 주는 한편, 중앙선관위 비상임 위원들에게 수당이 부당 지급되게 한 직원 3명은 징계 또는 주의 처분하라고 중앙선관위에 통보했다. 이와 별도로 감사원은 지난달부터 선관위 직원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에 관해 선관위를 상대로 직무감찰을 진행하고 있다.
중앙선관위가 감사원에 제출한 지난해 대선 때의 ‘소쿠리 투표’ 사태에 대한 자체 조사 결과에선 선관위의 주 업무인 선거관리에서 총체적인 부실이 있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중앙선관위 사무처는 사전투표 일주일 전인 지난해 2월 25일에야 코로나 확진·격리자의 사전투표 계획을 각 지방 선관위에 전달했고, 투표용지 운반 용기는 각 선관위가 알아서 준비하게 했다. 그 결과, 바구니나 종이 상자가 투표용지 운반에 쓰이는 일이 벌어졌다. 또 선관위는 질병관리청과 사전 협의한 확진·격리자 투표 시작 시각을 변경해놓고 질병청에 이를 알리지 않았고, 확진·격리자 투표 시간대에 인파가 몰려들 것으로 예측됐는데도 투표소가 얼마나 혼잡해질지, 확진·격리자 한 사람이 투표를 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등에 관한 사전 분석을 해보지도 않았다. 투표사무원이 유권자가 기표한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함에 ‘대리 투입’하는 것은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었는데도 이에 대한 법률 검토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