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조원 넘게 투입되는 반도체 산업 단지 조성 사업을 ‘물값을 내라’며 수개월간 지연시킨 지방자치단체장이 주의를 받게 됐다. 감사원은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이 지자체장의 사례를 전국 243개 지자체에 빠짐없이 알려 반면교사로 삼게 하라는 특별 요구까지 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공업용수를 대는 시설의 인·허가를 막았던 이충우(국민의힘·초선) 여주시장에 관한 이야기다.
감사원은 25일 이와 관련된 ‘소극행정 개선 등 규제개혁 추진실태’ 감사 보고서를 공개하고, 행안부에 이 시장에 대해 엄중 주의를 주라고 통보했다. 선출직으로 임기가 보장돼 있어 징계가 사실상 불가능한 지자체장에 대해 감사원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조치다. 감사원은 행안부에 “앞으로 지자체장이 지역 숙원 사업이라는 사유로 부당한 지시를 하여 인·허가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행정에 대한 국민·기업의 신뢰를 훼손하고 기업 활동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거나 기업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이 건 사례를 각 지자체장에게 전파하라”고도 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 414만㎡(약 125만평) 부지에 반도체 기업들이 모이는 단지를 만드는 사업이다. 공공부문에서는 2조3000억여원을 투입해 기반 시설을 만들고, SK하이닉스는 12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공장 4곳을 짓는다. 네덜란드 ASML을 비롯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 50여곳도 입주한다. 1만7000개 이상의 일자리와 188조원 이상의 부가가치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 단지가 가동되려면 여주시를 지나는 남한강에서 공업용수를 끌어와야 했다. 사업 시행사는 지난해 6월까지 이와 관련한 인·허가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공업용수 관로가 지나는 여주시내 마을 4곳과 경로당 및 농기계 창고를 지어주고 농로를 확장해준다는 내용의 ‘상생 지원’ 합의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감사원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지방선거로 당선된 이 시장이 갑자기 인·허가 절차를 중단시켰다. 이 시장이 내건 ‘조건’은 사업 시행사가 들어줄래야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중앙정부와 경기도가 그간 쌓여 있던 여주시 현안들을 다 해결해줘야 인·허가를 내줄 수 있다고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국토교통부가 여주시 일부에 지정해놓은 ‘자연보전권역’을 해제하거나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경기도가 여주시를 ‘K-반도체 벨트’에 포함시키며 능곡역세권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환경부가 여주시 하수도를 정비해줄 것을 요구했다.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여주시민들이 물길만 내주고 물값 한 푼 못 받고 불편만 겪고 있다”고 했다.
이 시장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용인 반도체 산단 용수 시설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김동연 경기지사는 물론 같은 당인 국민의힘 지도부까지 중재에 나서서 여주시에 지원을 약속하자 지난해 11월 뒤늦게 인·허가를 내줬다. 감사원은 여주시의 부당한 인·허가 지연으로 사업 시행사가 일주일에 17억원씩 손실을 봤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당선돼 취임한 강수현(국민의힘·초선) 양주시장도 감사원에 의해 엄중 주의를 받게 됐다. 양주 옥정신도시 내에 물류센터를 건설하려는 민간 기업이 지난해 3월까지 양주시로부터 정상적으로 건축 허가를 받았는데, 강 시장이 취임하자마자 건축 허가를 직권으로 취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진다’며 물류센터에 반대하고, 자기도 건축 허가 취소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양주시 공무원들은 강 시장에게 ‘건축 허가가 적법하게 이뤄졌으므로 취소가 불가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강 시장은 직권 취소를 계속 검토해보게 했다. 결국 양주시는 물류센터 시공사가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신청한 도로 점용 허가 신청을 지난해 7월 아무 법적 근거 없이 거부했다. 양주시는 시공사가 행정소송을 제기하자 지난해 11월 뒤늦게 도로 점용 허가를 내줬다. 감사원은 강 시장에 의해 물류센터 공사가 4개월 이상 지연됐고, 기업이 한 달에 6억7000만원씩 손실을 봤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