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 전경 ./뉴스1

공직자들이 업무를 소극적으로 수행해 국민과 기업을 괴롭히고 규제 개혁에 저항해 온 행태를 지적하는 감사원 감사 보고서가 공개됐다. 이전까지 감사원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한 일’ 가운데 잘못이 있는지를 따졌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기업에 불편을 주지는 않았는지를 따졌다. 감사원은 25일 ‘소극 행정 개선 등 규제 개혁 추진 실태’에 관한 감사 보고서를 공개하고, 경기 여주시·양주시와 서울시,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소방청을 지목해 이들이 합당한 근거 없이 인허가 절차를 지연시키거나 복지부동 태도로 국민에게 피해를 줬다고 지적했다. 위법·부당한 사항 20건이 확인돼, 자치단체장 2명에게 주의 통보, 공무원 6명에게 징계·문책이 요구됐다.

이충우(국민의힘·초선) 여주시장은 120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국책 사업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을 지연시켰다가 ‘엄중 주의’를 받게 됐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414만㎡(약 125만평) 부지에 반도체 산업 단지를 만드는 사업이다. 공공 부문에서는 2조3000억여 원을 투입해 기반 시설을 만들고, SK하이닉스는 12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공장 4곳을 짓는다. 국내외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 50여 곳도 입주한다. 1만7000개 이상의 일자리와 188조원 이상의 부가가치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 단지가 가동되려면 여주시를 지나는 남한강에서 공업용수를 끌어와야 했다. 사업 시행사는 관련 인허가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주민들과 ‘상생 지원’ 합의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시장은 지난해 7월 취임하자마자 인허가 절차를 중단시키고, 중앙정부와 경기도에 그간 쌓여 있던 여주시 현안들을 다 해결해줘야 인허가를 내줄 수 있다고 했다.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여주시민들이 ‘물값’ 한 푼 못 받고 불편만 겪고 있다”고 했다. 감사원은 이 시장으로 인해 사업이 지연돼 시행사가 일주일에 17억원씩 손실을 봤다고 했다.

강수현(국민의힘·초선) 양주시장은 옥정신도시 내에 물류센터를 건설하려는 민간 기업이 지난해 3월 양주시로부터 정상적으로 받은 건축 허가를 취임하자마자 취소시키려 했다.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진다’며 물류센터에 반대하고, 자기도 건축 허가 취소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양주시는 물류센터 시공사가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신청한 도로 점용 허가 신청을 법적 근거도 없이 반려하기도 했다. 감사원은 이로 인해 공사가 4개월 이상 지연돼 시공사가 한 달에 6억7000만원씩 손실을 봤다고 했다.

감사원은 행정안전부에 이 시장과 강 시장에 대해 각각 엄중 주의를 주라고 통보했다. 선출직으로 임기가 보장돼 있어 징계가 사실상 불가능한 지자체장에 대해 감사원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조치다. 두 지자체장의 사례를 전국 243개 지자체에 빠짐없이 알려 반면교사로 삼게 하라는 특별 요구까지 했다.

서울시는 심야 택시 승차난으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와중에 ‘무단 휴업’ 택시는 제대로 단속하지 않고 택시요금만 올려줬다는 지적을 받았다. 택시들은 면허를 통해 여객 운송 시장을 독점하는 대신, 정해진 기간에는 운행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런데 감사원이 조사해 보니, 서울시에선 지난 4년간 평균 운행률이 57%에 불과할 정도로 무단 휴업이 만연해 있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택시 기사 고령화로 심야 운행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무단 휴업자를 제재하는 것은 심야 승차난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국토부는 건설 현장에서 콘크리트믹서트럭(레미콘) 공급 부족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공신력 없는 1인 연구소에 수급 예측을 맡겨두고, 이 연구소가 ‘레미콘 공급 과잉’이라고 조작한 결과에 따라 2009년부터 10년 넘게 레미콘 신규 등록을 금지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레미콘 수급 조절을 논의하는 위원회는 한국노총·민주노총 등 레미콘 신규 공급에 반대하는 단체들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금융위는 새로운 금융 서비스에 대해 2년간 규제 면제 특례를 받을 수 있게 한 금융혁신법을 껍데기만 남겨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규제 면제 특례를 줄지를 결정하는 위원회에 기업들이 직접 신청하지 못하게 하고, ‘사전 심사’ 절차를 멋대로 만들어 규제권을 계속 휘둘러온 것이다. 소방청은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화재 경보 시스템이 나타났는데도 기존 경보기 업체들의 민원을 이유로 새로운 시스템이 사용될 수 없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