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전기·가스·철도·도로요금 등 공공요금의 인상을 부당하게 억눌러, 한국전력을 비롯한 주요 공기업의 부채가 5년간 88조원 넘게 추가로 쌓였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나왔다. 공공요금 인상을 계속 미루면 공기업들이 급속하게 부실화될 것이라고 관계 부처들이 계속 경고했지만, 문 정부는 이와 관련해 아무 대책도 논의하지 않았다는 점도 드러났다. 정권이 당장의 인기를 위해, 국민과 기업들이 진작 나눠 졌어야 하는 수십조원의 부담을 다음 정권과 미래 세대에게 떠넘긴 것이다.
감사원이 10일 공개한 ‘공공기관 재무건전성 및 경영관리 실태’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전·한국수력원자력·한국가스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 12곳과 한국토지주택공사(LH)·한국수자원공사·한국철도공사(코레일)·한국도로공사 등 SOC(사회간접자본) 공기업 4곳의 부채는 문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 말 271조3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392조5000억원으로 5년 새 121조2000억원 늘었다.
이 부채들이 무슨 이유에서 늘어난 것인지를 감사원이 분석해 보니, 공기업들이 자체 사업을 잘못해서 생긴 부채는 2조9000억원(2.4%)에 불과했다. 약 4분의 3인 88조5000억원(73.0%)은 정부가 공공요금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공공요금과 관련된 이유로 적자가 발생해 공기업들이 떠안은 부채였다. 29조7000억원(24.5%)은 정부 업무를 공기업들이 대행하거나 위탁하는 사업의 적자로 생긴 부채였다.
특히 한전과 가스공사는 문 정부가 전기·가스요금을 번번이 동결하면서 급격히 부실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전의 부채는 2017년 말 30조4000억원이었지만, 5년 만에 59조6000억원이 늘어, 지난해 말 90조원이 됐다. 이 가운데 한전 자체 사업의 적자로 생긴 빚은 1조7000억원(2.9%)에 불과했고, 거의 전부(97.1%)인 57조9000억원은 전기요금을 올리지 못해 생긴 빚이었다. 가스공사도 2017년 말 26조3000억원이었던 부채가 지난해 말 49조원으로 22조7000억원 늘었는데, 92.1%인 20조9000억원이 가스요금을 올리지 못해 쌓인 빚이었다.
문 정부는 2021년 1월 발전에 들어가는 석유·천연가스·석탄 등의 가격이 오르내리는 대로 전기요금도 인상 또는 인하되게 하는 ‘연료비 연동제’를 스스로 도입했다. 그러나 국제 천연가스 가격 상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으로 연료비가 급등해 전기요금을 실제로 인상해야 할 때가 되자, 연료비 연동제의 취지를 저버리고 전기요금을 계속 동결시켰다. 2021년 4분기에 한 번, 1kWh(킬로와트시)당 3.0원을 올렸을 뿐이다. 이때도 실제로는 1kWh당 10.8원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1분기에는 14.8원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동결시켰다. 그러다가 정권 교체가 확정된 지난해 3월 말에 갑자기 6.9원을 올렸다.
현행 물가안정법에 따르면, 공공요금 인상은 기획재정부가 동의해야만 가능하다. 문 정부는 기재부가 전기요금 인상에 반대하게 하는 방법으로 전기요금을 묶어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1년 3분기부터 ‘연료비가 급등하고 있어, 전기요금을 그대로 두면 한전에 대규모 영업 적자가 발생한다’며 전기요금 인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재부가 ‘코로나19 장기화, 높은 물가상승률, 국민 생활 부담’을 이유로 반대해 인상이 무산됐다.
전기요금은 정권 교체가 확정된 지난해 2분기부터 본격적으로 인상돼, 올해 2분기까지 총 40.4원(39.6%)이 올랐다. 이마저도 올려야 하는 만큼에 비해 충분히 올리지 못한 것이다. 연료비 상승에 따른 전기요금 인상은 법령상 한 분기에 5.0원까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추가로 발생한 수십조원의 적자 상당 부분은, 문 정부 때부터 미리 요금을 올렸다면 생기지 않았을 적자다.
가스요금도 기재부 반대로 요금 인상이 제때 이뤄지지 못했다. 2021년 국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산업부가 요금 인상을 추진했으나, 기재부가 반대하면서 2021년 7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요금 인상이 6차례 유보됐다.
감사원은 문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인 이유에서 공공요금 인상을 억눌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감사원은 문 정부가 요금 인상을 계속 미루면 그 부담이 차기 정부로 넘어간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는 것을 파악했다. 문 정부는 2021년 12월 17일 ‘경제 현안 조율 회의’를 열어 전기·가스요금 인상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 회의에는 홍남기 기재부 장관, 문승욱 산업부 장관, 구윤철 국무조정실장,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 박원주 청와대 경제수석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기재부 주장대로 전기요금을 억누르면 “요금 인상 부담을 차기 정부에 전가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산업부는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한전 경영진의 배임과 정부 관계자의 직권남용에 해당할 수 있고,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라는 강경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3.0원 인상이었다.
감사원은 문 정부가 공공요금 동결로 한전 등에 발생할 대규모 적자에 대한 대책은 논의하지 않았다는 점도 파악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기재부가 전기요금 인상에 반대하면서, 한전의 대규모 적자를 해소하는 방안은 검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2021년 이후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국면에서 영국·독일·프랑스·미국·일본 등은 전기요금을 9~68% 인상했다”며 “연료비 상승에도 요금을 조정하지 않으면 공기업의 재무구조가 악화돼 전기·가스의 안정적인 공급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요금에 반영되지 못한 연료비가 정산 대상으로 누적돼, 향후 전기·가스요금 인상 압력으로 작용하는 등 미래 소비자에게 부담이 전가된다”며, “보다 합리적으로 전기·가스요금 조정 체계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