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고위직을 역임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하는 민간 단체의 대표로 있는 인사가 정부 보조금을 부정하게 타낸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감사원은 이를 포함해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정부 보조금을 받은 민간 단체 중 10곳이 보조금 17억4000여만원을 조직적으로 횡령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정부가 민간 단체에 매년 지급하는 보조금은 2021년 기준 23조원에 달하고, 감사원이 찾은 횡령은 이 가운데 행정안전부·서울시 등 7개 기관이 연간 2조8000여억원 지급하는 보조금을 받은 단체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선별 조사한 결과다. 민간 단체들이 정부 보조금을 부정 수급한 전체 규모는 더 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감사원이 17일 공개한 ‘비영리 민간 단체 지원 실태’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A정책센터 이사장 신모씨는 2018년 여성가족부가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진행한 사업에 참여했다. 하루에 9시간씩 주 3일 근무하는 조건이었으나, 신씨가 제대로 출근한 날은 100일 중 26일에 불과했다. 24일은 미국에서 개인 용무를 본다며 한국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씨는 회계 담당 직원에게 자신의 근무 확인서에 대리 서명하게 했고, 인건비 666만원을 받아 챙겼다. 2021년에는 ‘민간 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는 사업을 수주했어도, 해당 단체의 비상근 임원은 인건비를 지원받을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고 인건비 1080만원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여가부에는 ‘보조금을 정당하게 집행했다’고 보고했다.
신씨는 윤미향 무소속 의원에 앞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에서 상임대표를 지냈고, 2000년부터 2018년까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부위원장, 유엔 경제·사회·문화 권리위원회 위원 등 유엔 고위직을 역임했다. 신씨는 감사원 조사에서 ‘관련 규정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김모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대표로 있는 B운동본부는 ‘병영 독서 활성화 지원 사업’ 등을 수행하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방부로부터 매년 수십억원의 보조금을 받아 왔다. 그런데 김 전 장관이 단체 운영을 일임한 민모씨는 회계 담당 직원과 짜고, 지인과 가족을 병영 독서 강사로 허위 등록한 뒤 이들에게 지급된 강의료를 되돌려받는 등의 수법으로 10억5000여만원을 횡령했다. 빼돌린 돈은 딸 주택 구입비, 손녀 승마용 말 구입비 등으로 썼다. 김 전 장관에게도 선물을 상납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가 집중된 경기도 안산시를 지원하기 위한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과 관련한 보조금을 횡령한 민간 단체들도 적발됐다. C청년회 등 3곳은 안산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역사와 인문학 독서 토론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보조금을 타낸 뒤, 1000여만원을 단체 운영비 등 다른 용도로 쓴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보조금은 ‘북한 바로 알기’나 ‘김일성 항일 투쟁사’ 교육 등에 썼다.
김모 전 총무처 장관이 회장으로 있는 D협회는 한·중 간 공공 외교 활성화를 위한 행사를 하겠다며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외교부로부터 보조금 7억50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김 전 장관은 행사 진행 요원들 앞으로 나오는 인건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돌려받는 방법으로 약 1200만원을 빼돌렸다. 감사원은 김 전 장관이 정부 보조금 횡령과 별개로, D협회 차원에서 모금한 찬조금 7억3000만원 가운데 9000여만원을 현금으로 인출한 사실도 확인해 관련 정보를 수사 기관에 넘겼다.
감사원은 앞서 지난 5월 A정책센터 등 10개 민간 단체 관계자 73명을 횡령, 사기, 보조금법 위반 등 혐의로 경찰에 수사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