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공사와 관련한 비용으로 쓰라고 책정된 공금을 빼돌려 사적으로 쓴 공직자 1300여명이 적발됐다. 일부는 공금으로 고가 의류와 신발, 시계를 샀고, 공짜로 유럽·호주 여행을 다녀온 경우도 있었다.

정승윤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 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공금인 시설부대비로 고가 의류 물품 구입, 출장비 부당 수령, 외유성 국외 출장을 한 지자체·공직유관단체 등 14개 기관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가 5일 공개한 지방자치단체·교육청·공공기관 시설부대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은 공사 현장을 감독할 때 착용해야 하는 안전모·안전화를 살 예산으로 책정된 ‘시설부대비’를 유용해,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의 패딩과 신발, 스마트워치 등을 사서 나눠 가졌다. 이들은 안전모·안전화를 사야 하는 인원 수를 실제보다 2배 이상으로 부풀린 공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1인당 최대 500만원어치 물건을 챙겼다. 공사 감독 업무와 무관한 공무원 40명도 이 돈으로 산 옷과 신발 1548만원어치를 받았다. 이 지자체에서 이렇게 엉뚱하게 쓰인 시설부대비는 1억7020만원에 달했다.

시설부대비는 공공기관이 시설 공사를 집행할 때 필요한 각종 부대 비용을 처리하기 위해 책정되는 경비다. 공사 계약을 체결하는 데 들어간 수수료, 측량 수수료, 담당자가 공사 현장을 감독하러 갈 때 들어가는 여비와 체재비, 안전모·안전화 등 안전용품 구입비 등으로 써야 하는 돈이다. 시설부대비는 공사 규모에 맞춰 어느 정도의 금액을 책정해두게 돼 있는데, 공사별로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에 달한다. 평균적으로 27%가량이 남고 있는데, 권익위는 다수 공직자가 이 돈에 대한 감시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쌈짓돈처럼 써 왔다고 지적했다.

권익위가 전국 지자체와 공공기관 가운데 27곳을 표본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울산시, 세종시, 경북도, 울산 동구, 강릉시, 상주시, 남원시, 구례군, 영동군, 충북교육청, 강원교육청, 부산교육청, 한국농어촌공사, 국가철도공단 등 14곳에서 중대한 시설공사비 유용이 적발됐다.

공공기관 직원들이 공금으로 구입한 스마트워치와 외장하드. /권익위

울산시 등 지자체 9곳은 시설부대비로 고가 스포츠 의류와 신발, 스마트워치, 외장 하드디스크 등을 6억4076만원어치 사서 공무원들끼리 나눠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는 공사 감독 업무와 무관한 상급 공무원에게 상납됐다. 충북·강원·부산교육청을 포함한 8개 기관 공직자들은 공사 현장으로 출장을 가지도 않고 출장을 다녀왔다고 허위 보고하거나, 출장을 다녀온 시간을 허위로 입력해 출장여비 2억8158만원을 부당 수령했다. 이 가운데에는 임차 차량으로 출장을 다녀와놓고 자기 차량을 이용했다고 거짓 신고해 유류비까지 챙겨간 경우도 있었다.

공공기관 2곳 임직원들은 해외 출장에는 아예 쓸 수 없는 시설부대비를 유용해 외유성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한 기관에서는 16명이 시설부대비 1억1000만원으로 지난해 11월 20일부터 28일까지 8박9일간 네덜란드·독일·벨기에 등 유럽 4국을 돌고 왔고, 다른 기관에서도 33명이 1억1759만원으로 지난해 11월 9일부터 18일까지 9박10일간 프랑스·스위스·호주 등 12국을 돌고 왔다. 출장 사유는 “선진지 견학”과 “기술 조사”였다. 이런 시설부대비를 유용한 외유성 출장을 기관장이 직접 지시한 경우도 있었다.

시설부대비를 유용한 것으로 권익위가 적발한 공직자는 이 14개 기관에서만 13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이 사적으로 사용한 금액은 12억원이 넘었다. 권익위는 각 기관에 조사 결과를 통보하고, 부당하게 쓰인 시설부대비를 환수하라고 요구했다.

정승윤 권익위 부패방지 담당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은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시설부대비는 국민의 세금인 만큼, 사적 물품을 구입하거나 개인이 부당하게 지급받는 것은 전형적인 부패 행위로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각급 기관에 이와 같은 사례를 전파해 자체 감사를 실시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시설부대비가 부당하게 쓰이지 않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